본문 바로가기

N O V E L/저주받은 나라26

저주받은 나라 3부 - 08 3부、가시나무 숲 루나가 안내받은 내빈실은 응접실과 그 안으로 이어진 침실로 구성된 작은 집과 같은 구조였다. 침실에는 새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침구가 정갈히 놓여 있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당장이라도 몸을 누이고 싶은 유혹이 솟구쳤지만, 루나는 기사단 근무 시절 내빈을 호위 혹은 방문하러 자주 찾았던 이곳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루나가 침대 시트를 두어 번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흰색의 절제미가 있던 침실과 대조적으로, 응접실에는 고급스런 가구들이 이 공간을 찾은 이를 편히 대접하겠다는 듯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특히 한 가운데에 위치한 응접세트의 의자와 테이블은 그 세공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든 것이 루나의 집, 그리고.. 2014. 3. 22.
저주받은 나라 3부 - 07 3부、가시나무 숲 “여기가 마지막인가.” 리나는 홀로 도시의 구석을 걷는 중이었다. 큰 길을 벗어난 골목이지만 양 옆으로 가게들이 간간이 늘어서 있어 평소라면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만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가게의 문이 닫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이 가득했다. 한산한 거리를 여자 두엇이 종종걸음으로 길을 지나고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리나가 손에 들고 있던 양고기 꼬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으, 이것도 이젠 질린다, 질려.” 양념이 듬뿍 밴 잘 만들어진 꼬치였지만 이미 물려버린 입에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라고 한숨을 내쉬며 리나가 입을 우물거렸다. 일부러 볼을 부풀려 한껏 맛있다는 듯한 과장된 표정을 지어본다. “이야아, 여기 꼬치 진짜 맛있네…….” 원.. 2014. 2. 22.
저주받은 나라 3부 - 06 3부、가시나무 숲 다음날 오후, 리나와 가우리는 세일룬 시티의 육망성을 바라보며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앞에 자리한 하얀 성벽이 마치 장막과도 같이 답답하게 그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세일룬의 도시 몇 개를 지나오며 약간의 탐문조사를 한 결과 알아낸 정보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아멜리아의 죽음에 대해 세일룬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전쟁을 위해 집결한 병사들이 세일룬 시티를 출발한 지 일주일을 훌쩍 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멜리아로 변한 키르샤가 전쟁을 일으켰거나, 아멜리아의 죽음을 숨기고 그녀가 아닌 다음 왕위계승자, 혹은 브니두 등의 권력자가 전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일주일이라면 제피리아와의 국경지대에서는 이미 전투가 벌어.. 2014. 2. 22.
저주받은 나라 3부 - 05 3부、 가시나무 숲 다음날 아침, 리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이미 식사시간이 한참 지난 때여서 식당은 텅 비어 있었고 제르가디스가 홀로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좋은 아침, 제르으.” “좋은 아침. 그런데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별 건 아니고, 어제 살짝 과음했나봐.” 리나가 빈 의자에 앉고는 힘없이 테이블 위에 머리를 뉘였다. 제르가디스가 한숨을 내쉬며 물을 리나에게로 내밀었다. “으으, 땡큐.” “그러게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그러냐.” “그냥……. 가끔 술에 취하고 싶을 때도 있는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혹시 어제 말하던 마족 때문이야?” 제르가디스의 질문에 리나는 막 삼키려던 물을 뿜어낼 뻔 했다. 간신히 물을 삼키고는 어색.. 2013. 3. 24.
저주받은 나라 3부 - 04 3부、 가시나무 숲 아침이 되어 리나와 가우리, 제르가디스는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르가디스는 원래 가려던 곳이 있어서 가까운 마을까지만 동행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결정되자 리나가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가우리가 조금 더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지만 일단 결정한 리나는 막무가내일 뿐이었다. 등을 떠밀린 가우리와 제르가디스는 못 말린다는 얼굴들을 하며 각기 가방을 짊어 맸다. 미르가지아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중 리나가 말을 꺼냈다. “아, 미르가지아 씨. 혹시…….” “인간에게 줄 식사는 없다.” “그거 말구요~!” 리나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더니 미르가지아의 팔을 잡아끌고는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인간이여?” “그……, 어제 말씀드린 거요. 앞으로 그 녀석을 또 만나.. 2013. 2. 5.
저주받은 나라 3부 - 03 3부、 가시나무 숲 달이 밝은 밤이었다. 미르가지아가 그들을 위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지만 리나는 홀로 숙소 밖의 뜰을 거닐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나, 인간이여?” 미르가지아가 리나의 등 뒤에서 나타나 말을 걸었다. 갑작스런 소리에 리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놀랐다면 미안하다.” “네에, 미르가지아 씨였어요? ……머릿속이 좀 복잡해서요, 잠이 오질 않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생각해보니 자네들이 이 곳에 올 이유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저 합성수 사내와 비슷한 시기에 온 것도 그러하고 말이다.” “아, 저는 다른 목적으로 온 것이에요. 이제는 그 목적이 사라져 버렸지만요.” “흠?” “제르가 클레어바이블을 보고 왔다니 그걸로 됐어요. 그리고 그 녀석과는 정말 우연히 만난 거예요. 저랑 가우리.. 2013. 1. 13.
저주받은 나라 3부 - 02 3부、 가시나무 숲 울창한 산맥을 뚝 잘라 놓은 것만 같은 절벽의 한 쪽 자락. 그 곳에 바람 한 가닥 불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테이블 하나 남짓할 넓이의 그 공간은 언뜻 보기에 평범한 곳이었다. 그러나 울타리가 쳐진 것이 아님에도 그 공간만이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충만해 짐승들도 감히 그 곳을 범접하지 못하였다. 바닥의 풀은 푸른색이 아닌 백금색으로 햇빛을 반사하며 그 자태를 뽐냈다. 어느 순간 절벽이 꿈틀, 움직였다. 정확히는 절벽의 한 쪽 바위가 부드럽게 변하며 살아있는 듯이 움직였다. 이윽고 그 안쪽에서부터 다리가, 팔이, 그리고 몸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육신의 주인은 절벽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평범한 걸음을 옮겼다. “아……. 드디어 빠져나왔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 2012. 12. 26.
저주받은 나라 3부 - 01 3부、 가시나무 숲 “파이어 볼!” 밤의 적막을 깨치고 산의 한 쪽 자락에 폭음이 피어올랐다. 이런 저런 비명과 칼부림의 소란을 무시한 채로 리나는 주문 한 방을 더 날렸다.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리나.” 리나와 가우리가 있는 곳은 세일룬 변경의 성채도시였다. 랄티그 왕국과 가장 가까운 세일룬령인 만큼 경비가 삼엄해야 마땅했지만 어째서인지 경비병이 눈에 띄지 않았고, 그 덕분에 인근 지역에서는 도적들이 활개를 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도적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의 구석에는 커다란 산이 하나. 리나에게 있어 그들의 산채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더불어 가우리가 난리를 피우고 있는 리나를 찾는 것 역시 쉬운 일이었지만. “기분은 알겠지만……. 리나?” 가우리는 리나를 한 번 더 부르려다 입을 다.. 2012. 12. 26.
저주받은 나라 3부 - 프롤로그 3부、 가시나무 숲 바람이 휘몰아쳤다. 서로 부딪히는 나뭇가지와 덤불들이 거센 울음소리를 만들어냈다. 하늘까지 감겨 올라간 낙엽 조각들이 마치 결계와도 같이 그 곳을 호위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생명체의 접근을 거부해온 것만 같은 덩굴 속으로 그는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살갗을 파고들려는 양 거세게 달려들었지만 그는 산들바람 속을 걸어가듯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하얀 망토만이 가시에 걸려 작은 생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기도 틀렸나.” 잠시 후, 덤불 안에서 나온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바래다 못해 모래의 색으로 누렇게 물들어버린 낡은 종이가 그의 손에서 바스러졌다. 종이조각은 이내 날아다니는 낙엽들과 함께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은 제피리아였던가... 2012. 10. 25.
저주받은 나라 2부 - 11 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바람이 좁은 방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공기의 흐름은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귓가에는 계속해서 바람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아멜리아! 아멜리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멜리아아……!!” 그것은 이루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이 이룬 신음소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살아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고깃덩이였다. 차라리 바람이 좁은 복도를 빠져나가며 내는 소리라고 믿고 싶을 정도의 신음소리가 그것에게서 들려왔다. 가우리가 소리를 지르며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썩은 살의 냄새라든지 피의 비릿한 내음 따위는 느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손을 뻗으려는 찰나, 가우리는 자신의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뱀의 모습에 소스라치며 물러설 수밖에 없.. 2012. 9. 23.
저주받은 나라 2부 - 10 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병사들은 공격 주문이라도 외우는가 싶어 달려들며 리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주문의 완성이 조금 더 빨랐다. “어이 너!” “―리커버리!! 크로펠 씨, 괜찮아요?! 지금 치유 마법을 걸었으니 금방 괜찮아질 거에요, 조금만 참아요!” “응? 뭐냐, 너희들이 이런 것이 아냐?” 리나의 행동에 병사들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집무실에서 벌어진 난동과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병사들이 다시 리나를 구속하려 하자 크로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손을 들어 이들을 제지했다. “괜찮네, 놓아주게. 난 멀쩡하니 리나 군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괜찮긴요, 겉보기엔 이래도 내상을 입었을 거라구요! 이봐요, 성 안에 마법의는 없어요?” “괜찮다니.. 2012. 9. 21.
저주받은 나라 2부 - 09 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이건……?” 익숙한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소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엉겨붙어 바닥 위로 흐트러졌다. 그리고 무수한 생채기가 남은 잿빛 피부.처참한 몰골의 소녀— 아멜리아를 보며 가우리가 탄식했다. 가우리가 떨리는 손을 아멜리아에게로 뻗었다. 그 손 끝이 어깨에 닿자 아멜리아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으음. 가우리 오빠……?” “응 그래, 우리야. 괜찮니 아멜리아?” 아멜리아는 아직 몽롱한 듯 눈을 깜빡거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깔끔했을 집무실은 온갖 집기들이 부서져 있었고 여기저기 찢겨진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 곳에 있는 사람은 어딘가 지쳐보이는 리나와 가우리 뿐. 아멜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아, 그런가요. 절 .. 2012.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