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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O V E L/저주받은 나라

저주받은 나라 2부 - 10

by waitress 2012. 9. 21.

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병사들은 공격 주문이라도 외우는가 싶어 달려들며 리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주문의 완성이 조금 더 빨랐다.


“어이 너!”


“―리커버리!! 크로펠 씨, 괜찮아요?! 지금 치유 마법을 걸었으니 금방 괜찮아질 거에요, 조금만 참아요!”


“응? 뭐냐, 너희들이 이런 것이 아냐?”


리나의 행동에 병사들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집무실에서 벌어진 난동과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병사들이 다시 리나를 구속하려 하자 크로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손을 들어 이들을 제지했다.


“괜찮네, 놓아주게. 난 멀쩡하니 리나 군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괜찮긴요, 겉보기엔 이래도 내상을 입었을 거라구요! 이봐요, 성 안에 마법의는 없어요?”


“괜찮다니까. 그보다…… 쿨럭,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저 분은…… 아멜리아 님이 맞는 거지……?”


크로펠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고 잦아들었다. 절박한 크로펠의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리나는 괴로운 듯 대답을 망설이더니 그를 마주보는 자세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보셨나요?”


“아멜리아 님이 돌아오셨는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문이 갑자기 부서지기에 무례하게도 그 안쪽을 엿보고 말았네. 그런데…… 그렇다면, 아까 그 사람은 누구인가……? 아니 그보다, 아멜리아 님은 어디에 계시는 게야? 무사하신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건가?”


“무슨 일…… 이냐면요…….”


어디에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리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리나와 크로펠이 아무런 대화를 잇지 못한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고착된 상황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소대장급으로 보이는 병사 한 명이 주위에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이 랑케, 대신전에 가서 치료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신관이나 무녀를 모셔와라. 이 시간이라면 마법의는 모두 퇴궁했을 거다. 비드는 가서 지원부대를 불러오고, 한스는 이 분들을 모셔가 자세한 상황을 기록해 두도록. 난 왕녀님을 뵙고 안위와 상황을 여쭈어보겠다.”


“자, 잠깐만요!”


병사들이 각자 지시에 따라 움직이려던 찰나, 그들을 막아선 것은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우리였다.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가면 그 녀석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말해 위험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조금 전 왕녀님이 방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자세히는 보지 못하였지만 걸음걸이가 불편하신 것처럼 보였고요. 두 분이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왕녀님이 무사하신 지는 알 수가 없군요. 저에게는 왕녀님의 안위를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가우리의 다음 말은 리나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통에 이어지지 못했다. 가우리가 리나를 내려다보자 리나가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있었다. 이 곳은 왕성이며 가우리가 언급하려는 이는 경위가 어찌되었든 군주에 해당하는 자. 섣불리 입을 놀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키르샤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마도 퍼포먼스. 굳이 겉모습을 아멜리아로 바꾼 것을 보면 곧 집무실에 도착할 병사들에게 뒷모습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크로펠 씨, 성에는 비상통로가 있죠? 혹시 집무실에…… 그러니까, 저 안쪽 방으로 연결된 것이 있나요?”


“그건 말할 수 없는 것이네. 어째서 그것을 물어보는 건가?”


“말…… 못해요. 이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도 없잖아요?”


리나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크로펠 씨. 보셨잖아요? 다 듣고 계셨죠?”


그 이상 말하는 것은 어려웠다. 듣는 귀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 같기에 두려움도 있었다. 크로펠의 얼굴 위로 어둠이 점차 드리워졌다.


“문이 부서진 다음부터는……. 아아, 그렇다면 사실이란 말인가? 내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란 거야……?”


“…….”


“믿을 수가 없네. 믿을 수가!”


크로펠이 고개를 숙이더니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난 하룻밤 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보통의 정신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들뿐이었다.


“……언제? 언제부터 그런 것인가?”


“그건……, 물어보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어요. 다만 아멜…… 아니, 그 애가 죽지는 않았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요. 어쩌면 바로 어젯밤에 바뀐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리나가 다짐하듯 힘을 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무리이다 싶을 정도의 최상의 기대가 들어맞기를 기원하는 마음과 함께. 리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성 안 어딘가에 있어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마 ‘이 안’일 거예요.”


말하며 리나는 문제의 문― 키르샤가 사라졌고 지난 밤 음식들이 버려져있던 방들로 향하는 문을 가리켰다.


“길을, 가르쳐 주세요.”


크로펠이 힘없이 리나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 안에는 분명 비상통로가 존재했다. 그러나―.


“저 곳에는 없네……. 내가 모두 찾아보았어.”


크로펠은 더 이상 버티어 낼 힘마저 잃은 듯 얼굴을 감싸던 두 손을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리나 역시 휘청 하며 몸이 흔들렸다. 가우리가 팔을 잡아주어 가까스로 서 있을 수 있었다. 마지막 희망, 비추던 가느다란 빛은 허상이었나. 남아있던 다섯 명의 병사는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입을 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헤치며 한 무리의 병사들과 몇몇 관리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며 법석을 떨었지만 리나는 아무것도 답해줄 수 없었다. 정황 상 리나와 가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둘은 결국 경비병들에 의해 양 팔이 붙들리는 신세가 되었다. 크로펠이 그들이 범인이 아님을 증언했지만 주요 참고인이라는 명목으로 붙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의 실랑이가 오간 후, 관리들은 한 무리의 병사들에게 안쪽 방의 조사를 지시하는 한편으로 리나와 가우리를 조사실로 데려가기로 합의했다. 문이 부서진 집무실 앞의 복도에서 언제까지고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리나와 가우리는 양 팔을 구속당한 상태로, 그리고 크로펠은 병사의 부축을 받아가며 천천히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크로펠이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멈추어 섰다.


“아, 어쩌면……!”


비상통로는 단 하나의 길. 그 모든 곳은 크로펠 자신이 이미 확인했다. 그런데 어쩐지 한기가 새어나오는 봉인된 문이 있었다. 그곳만은 확인하지 못했고, 더욱이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집무실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봉인된 문 그 너머에 연결된 곳에 아마도…….


“리나 군, 가우리 군. 잠시만 이리오게.”


“무슨 일이십니까, 크로펠 님?”


“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 그러네.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가 오른쪽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창문이 하나 있어. 그 창문의 왼쪽 창틀을 비틀어 꺾으면, 거울 뒤에 길이 열릴 걸세.”


“잠시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건 혹시 비상통로의……! 크로펠 님, 그것을 외부인에게 알려주시다니요!”


관리들이 언성을 높였다. 왕족 전용 비상통로의 존재는 자신들조차도 알지 못하는 극비 중의 극비. 그들 중 몇은 크로펠이 통증으로 정신이 나간 것이냐며 그를 막으려 했지만 크로펠은 완강히 거부하며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큰 통로를 따라가다 왼쪽에서 세 번째 문으로 들어가면 되네. 그 외의 문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으니 열어선 안돼. 내려가다 보면 한기가 새어 나오는 문이 있을 거야. 잠겨져 있었지만 자네들이라면 쉽게 열 수 있겠지.”


“크로펠 님?!”


빠르게 쏟아낸 후 크로펠이 몇 차례 기침을 했다. 입을 가리고 있던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리나가 경악하며 리커버리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지만 크로펠이 그런 리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크로펠 씨……?”


“어서 가 주게. 아멜리아 님을……, 우리의 왕녀 님을 구해줘.”


그 말을 끝으로 크로펠은 의식을 잃었다. 가까스로 리나에게 뻗었던 손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고, 리나의 손목에는 선명한 핏자국만이 남아있었다.


“크로펠 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녀님을 구해달라니요? 역시 왕녀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크로펠 님?!”


왕녀는 방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러한 병사의 증언을 듣고 관리들은 아멜리아가 안쪽 방, 혹은 그곳에 연결된 비상통로를 통해 어딘가로 나아갔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집무실이 초토화될 정도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에서 잠시 피신한 것이리라고. 안위를 확인할 수 없으니 얼른 왕녀를 찾아야만 했지만, 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였다.


모두들 법석을 떨며 크로펠을 붙잡았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후였다. 그런 혼란을 틈타 가우리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병사에게서 팔을 빼내고는 압수당했던 검을 빼앗았다. 리나도 병사 한 명을 뿌리치고 재빨리 몸을 틀어 구속에서 벗어났다. 둘은 서로를 흘깃 바라본 후 집무실로 달려갔다. 뒤따라오는 관리와 병사들이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지금은 멈출 수도, 설명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달리는 수밖에.


가야 할 곳은 단 한 곳. 비밀통로의 봉인된 문 너머이다.


“록(Lock)!”


가까스로 집무실 안쪽으로 이어지는 문을 통과한 후, 리나가 미리 외워둔 주문을 풀어놓았다. 카오스워드가 해방됨과 동시에 조금 전 가우리가 잘라둔 문의 경첩이 거짓말처럼 달라붙었다. 한 발 늦게 당도한 병사들이 문을 두드렸으나 마법의 주문으로 잠긴 이상 문을 부수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크로펠이 말한 ‘오른쪽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간 후 리나는 여기에도 잠금 주문을 걸어두었다.


“후우, 이걸로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응. 크로펠 씨가 말한 게 창틀이었지?”


“아마 왼쪽 창틀을 비틀어 꺾으면 된다고……?”


리나가 설명을 하던 중 흠칫, 몸을 떨었다.


“왜 그래, 리나?”


“쉿!”


리나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주위를 급히 둘러보았다. 분명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문 너머에서 병사들이 소리치는 것 정도. 그러나 그와는 다른 하나의 소리가 미미하게 들렸다.


“리나, 갑자기 바람소리 같은 게 들리지 않아?”


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꽉 깨문 입술만이 핏기를 잃은 채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리나?!”


“……가우리, 저 창틀을 꺾어줘.”


“그, 그래. 괜찮아?”


가우리의 물음에 리나는 작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은 얼굴이기에 무어라 말하려 하였지만 리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가우리가 걱정스런 한숨을 내쉬며 크로펠의 지시대로 창틀을 움직였다.


‘끼기긱―’


녹이 슨 철문 같은 소리를 내며 한 쪽의 벽이 빙글 돌아 어두운 통로로 그들을 안내했다. 리나와 가우리가 통로로 들어서자 벽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벽이 닫힌 후의 공간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그 앞이 평편한 길인지, 계단이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리나가 광량을 억제한 라이팅을 시전하자 눈앞에는 기다란 복도와 좌우로 늘어선 열 개의 문이 보였다.


“왼쪽 세 번째.”


“응.”


짧게 눈빛을 교환한 후 가우리가 문틈에 검을 찔러 넣었다. 문 너머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좁다란 계단이 길게 뻗어있었다. 둘은 말 없이 계단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쉼 없이 이어졌다. 통로가 구부러져 있어 그 끝이 보이지 않기에 더욱 길게 느껴졌다. 간간이 라이팅의 빛이 흐려지면 리나가 다시 주문을 외웠지만 그 밖의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발을 내디딜수록 바람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눅눅한 공기 역시 더욱 진해져 음습한 기분을 더했다.


3층의 집무실에서 시작한 계단이 지하에 닿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무렵, 바닥이 평평해지며 긴 복도가 보였다. 크로펠이 말한 ‘한기가 흘러나오는 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물쇠가 달려있는 문 하나에서 음산한 한기가 확연히 느껴졌다. 더불어 바람소리 역시 그 곳에서 들려오는 것인 듯 했다.


리나가 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문고리를 잡고 살짝 밀어보았다.


“어?”


봉인되어나가던 문은 너무도 쉽게 열려버렸다. 어째서? 크로펠 씨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리나가 천천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의 중심에 무언가가 있었다. 뒤따르던 가우리가 그것을 자세히 보려 리나에게 다가왔을 때 라이팅의 마법구가 갑자기 사그라졌다.


“리나, 불이 꺼졌어.”


주변은 다시 칠흑의 시야가 되었다. 그리고 둘은 이미 봉인된 문의 안쪽. 언제 적의 습격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다. 가우리가 긴장하며 말했지만 리나의 대답은 없었다.


“리나?”


“으, 응. 다시…… 켤게.”


리나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짧은 주문이 바람에 섞여 천천히 퍼져나갔다.


“……라이팅.”


광량을 억제한 빛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리나는 방에서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여전히 깨물려 있는 리나의 입술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가우리가 의아해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리나의 태도를 보면 그 안에 적은 없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흔들리는 빛의 구 아래로 괴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의 형태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어서 대체 무엇의 그림자인지 한 번에 알아볼 수 없었다. 가우리가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림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전체적인 모양은 분명히 사람의 그것. 그러나 그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치 내장이 뭉개진 것만 같은 피부, 그 살갗을 뚫고 튀어나온 뱀이 다시 몸으로 돌아가며 제 살을 뜯어먹었다. 피가 튀어 오르며 덩어리가 꿈틀거렸고 뱀은 피부를 뚫고 몸 안으로 사라졌다.


‘그 자’는 가우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일그러진 근육으로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다.


바람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아……, 아멜리아아――!!”

 

 

 


 

 

 


2012.9.27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12.9.29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