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가시나무 숲
아침이 되어 리나와 가우리, 제르가디스는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르가디스는 원래 가려던 곳이 있어서 가까운 마을까지만 동행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결정되자 리나가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가우리가 조금 더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지만 일단 결정한 리나는 막무가내일 뿐이었다. 등을 떠밀린 가우리와 제르가디스는 못 말린다는 얼굴들을 하며 각기 가방을 짊어 맸다.
미르가지아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중 리나가 말을 꺼냈다.
“아, 미르가지아 씨. 혹시…….”
“인간에게 줄 식사는 없다.”
“그거 말구요~!”
리나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더니 미르가지아의 팔을 잡아끌고는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인간이여?”
“그……, 어제 말씀드린 거요. 앞으로 그 녀석을 또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구요. 그런데 타리스만이 없는 저로서는 이렇다할 공격 수단이 없어서 다음엔 위험할 지도 몰라요.”
“클레어바이블을 다시 보고 싶나?”
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고위 마족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지난 번 클레어바이블과의 조우 때에 이미 답을 들었고 더 이상의 지식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방법은 알고 있는데 힘이 모자라요. 마력을 증폭하거나 최소한 제어를 도와주는 무언가라도 있지 않으면……. 지난번에 메피가 입고 있던 쟈나파 같이 새로 개발하셨다는 무기들 중에 혹시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을까요?”
미르가지아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눈을 감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쟈나파는 인간이 다루기엔 위험하고……. 다른 것들도 용이나 엘프가 다루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라, 인간에게 적합한 것은 사실 많지 않다. 마족에게 통할만한 바스타드 소드라면 하나 있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들어요.”
“하긴 여전히 꼬마……, 아, 아니다.”
알 수 없는 살기에 미르가지아가 급히 말을 돌렸다.
“음, 증폭기라. 신의 힘을 빌려 주문의 힘을 강화하는 도구가 있기는 한데, 그건 어떻겠나?”
“신이요? 쉬피드의 힘을 빌린다는 건가요?”
“정확히는 네 명의 분신을 말하는 것이지. 천년 전 결계에 갇히며 다른 분신들의 힘을 가져올 수 없었기에 그 동안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에, 천년 이라면…….”
미르가지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고장이 났을지도 모른다.”
“이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니……! 그 호칭은 삼가주게나, 인간이여. 이왕 부르려거든 유쾌한 미르씨라거나.”
“됐으니까 얼른 설명이나 계속해 봐요!”
“……흠흠, 그리고 아무래도 신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니까. 흑마법에도 통용이 될 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마력만을 증강시키는 장치도 있지만 주문에 작용하는 것이라면 힘의 상성이 중요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미르가지아 씨도 지난번에 수왕의 힘을 빌린 주문을 사용했잖아요. 용족이 흑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이 도구도 별 문제없는 것 아닌가요?”
“음, 이건 어린 용들의 마법 연습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레이저 브레스를 가는 실처럼 쏘아대는 아이들이 있어서 말이지. 이 도구를 사용했던 어린 용들이 흑마법을 쓸 일은 없을 테니, 그에 관한 고려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군요…….”
리나가 말을 잃은 사이 미르가지아가 방의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벽에 붙어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먼지와 함께 흘러들어왔다. 리나가 기침을 해댔지만 미르가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 너머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한참 뒤적거렸다. 잠시 후 그가 꺼내온 것은 먼지가 가득 쌓인, 한 손에 들릴 만한 작은 물건이었다.
“어디든 쓰일 곳은 있을지 모르지. 어차피 나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 얼마든지 빌려가게. 고장이 났다면 할 수 없지만.”
미르가지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 있는 것은 은색의 두 개의 팔찌였다. 리나가 두텁게 쌓인 먼지에 질색을 했지만 미르가지아가 마력을 살짝 가하자 먼지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깨끗해졌다. 팔찌에 각각 두 개씩 박힌 보석들이 각기 다른 색을 발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리나가 양손으로 팔찌를 받아들었다. 팔찌는 꽤나 두툼한 것이었지만 용의 수염이나 가죽 등으로 만든 것인지 보기보다는 가벼웠다. 리나가 양 손목에 팔찌를 끼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손목에 착 감겨 붙었다.
“와우, 마력에 반응을 하는 건가요?”
“오, 작동은 하는 모양이군. 그거 다행일세.”
“…….”
“강화 주문은 이것이다.”
그리고 미르가지아가 입을 열었다. 바람소리와도 같고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와도 같은 알 수 없는 소리가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자, 잠깐만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주세요!”
“음? 그렇군. 기다려보게, 인간용 카오스워드로 적어주지.”
미르가지아가 다시 창고로 들어가 뭔가를 뒤적거렸다. 또 다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그가 가져온 것은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그가 양피지 위에 손을 얹고 짧게 주문을 외우자 약한 빛이 양피지를 뒤덮었다. 빛이 사라진 후 양피지의 표면에는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것이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글씨 쓰는 것도 귀찮아서 주문을 만드신 건가요……?’
리나가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간신히 삼켰다. 도움이 될 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귀한 마법도구를 얻은 셈이니, 미르가지아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말은 삼가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리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미르가지아가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그나저나 인간이여, 이왕 도구를 빌려가는 김에 가서 고위 마족 한둘 쯤 더 없애주고 오게나.”
“……에?”
“뭘 그리 놀란 눈으로. 이제 얼마 안 남았잖나?”
“아, 아하핫!”
리나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미르가지아는 진담이라 주장하는 듯한 얼굴을 한 채로 리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물론 농담이냐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할 것이 뻔한 그였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되는 법! 이런 마력 도구를 빌려가는 리나 자신도 그렇지만 마족의 ‘마’자라도 입에 올리는 것은 실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라우쉐라 앞에서 같이 벌벌 떨었으면서 그렇다 나오신다 이건가요, 미르가지아 씨?”
“뭘, 내가 천 년 동안 만난 것보다도 더 많은 고위 마족들을 소멸 시키지 않았나.”
“……알겠습니다. 그럼 이 팔찌, 마족이랑 싸우다 고장이 나거나 하면 버려도 되는 거죠?”
리나의 말에 미르가지아의 표정이 아주 약간, 일그러졌다.
“버, 버리다니! 우리 용족의 귀한 유물이다. 원래는 용족들의 박물관에라도 놓여 있어야 할 물건이야!”
“그치만 창고에서 빼내 오신 거잖아요. 몰래 가지고 계시던 것 아니에요?”
“그, 그건……, 천년 전이면 나도 어린 아이였단 말이다. 누구든 장난으로 부모님의 물건 한둘쯤은 훔칠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라, 이 팔찌 안 빠지는데요? 사용자에게 딱 맞게 조여지는 것인가 봐요. 쓰다가 고장 나면 잘라서 골동품 점에 팔아버려야지. 천년은 넘은 것이니 꽤 값을 받겠네요.”
“이보게, 인간이여!”
잠시 후, 미르가지아의 방에서 빠져나온 리나의 양손에는 묵직한 자루 서너 개가 들려있었다.
“웬 자루야, 리나?”
“응. 미르가지아 씨가 어제오늘 굶겨서 미안하다고 오리하르콘을 주셨네? 얼른 내려가서 맛있는 것 사먹자, 가우리.”
그들이 산을 내려간 이후, 어딘가에서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
아침 일찍 길을 떠났지만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 되어서였다. 마을은 고요했고 식당의 불도 하나 둘 꺼져가고 있었다. 리나와 가우리가 막 문을 닫으려던 식당의 문을 열어젖히고는 모든 메뉴를 주르륵 불렀다. 퇴근을 하려던 웨이터가 울상을 지었지만 리나는 이를 무시하며 의자에 몸을 뉘였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다.”
“그러게 산길을 뭘 그리 뛰어가냐, 리나? 까짓것 산에서 노숙하고 아침에 내려와도 안 될 건 없잖아.”
“시끄럿! 거친 잠자리는 피부의 적이라구.”
“이미 나이가 들어서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면서…… 에, 에이 농담인 거 알잖아, 하하.”
리나가 품안에서 꺼내든 분홍색 슬리퍼를 보며 가우리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 둘을 보며 제르가디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는 아직도 똑같은 콩트를 하고 있냐. 오랫동안 함께 다녔으면서 질리지도 않아? 대체 몇 년째 그러고 있는 거야?”
리나와 가우리는 앵무새처럼 “몇 년?”라고 중얼거리다가 나란히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신선한 질문인데. 우리가 몇 년 째 여행을 한 거지, 리나?”
“으음, 루크……, 그 사건 이후로 제피리아에 가서 쉬다가. 집안일 좀 도우라는 언니의 불호령에 냉큼 정착해버렸지 뭐. 넌 그 동안 제피리아의 경비대 일을 했지?”
가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애피타이저인 야채수프가 나와 가우리가 접시에 숟가락을 넣고는 휘적거렸다.
“경비대 월급이 웬만한 용병보다 좋더라구. 사실 타국사람이라 왕성의 경비대로는 잘 안 뽑아 줄 텐데, 리나네 언니가 신원 보증을 한다고 하니 바로 오케이가 되었어. 리나네 언니, 대단한 사람인가 봐? 군에도 말이 통하고. 가끔 검술 대련을 했는데 어떻게 한 번 지지를 않더라구~.”
“그야 ……언니이니까. 쉬피드 나이트이기도 하니 나라에서 알아주는 거겠지 뭐. 겉보기엔 평범한 동네 아가씨인데 말이야.”
“응 그래, 뭐라는 사람이라고 했었지. 어쨌든 그렇게 한 2년 일했나보다~.”
말을 마치며 가우리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가우리의 스프 접시 옆에는 작은 초록색의 야채조각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시작한 지가 아마도 1년째? 이래저래 다해서 같이 여행한 지 3년 쯤 되었나. 그러고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소리만 하고 있기는 하네. 가우리는 여전히 피망을 골라내고 있고, 하하.”
“3년이나 붙어 다녔으면서 똑같은 이유로 툭탁거리다니. 정말 변한 것이 없구만, 너희들은.”
“아냐, 제르가디스! 이제는 리나가 화를 낼 타이밍 직전에 그칠 줄 알게 되었다고. ……저것 봐, 또 슬리퍼가 나왔잖아? 이제 한 마디만 더 하면,”
‘퍽!’
예상대로 혹은 노린 대로, 가우리의 머리 옆에서 분홍색 슬리퍼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가우리가 이것 보라며 씨익 웃다가는 슬리퍼에 한 방 더 맞고는 리나에게 항의를 했고, 이후 다시 날아든 슬리퍼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으휴, 못하는 말이 없다니까! 그러는 너도 똑같은 걸 제르. 거의 4년 만에 만난 셈인데 1년 치도 나이를 먹지 않은 것 같아.”
“그야…… 키메라니까.”
“……으이구, 그러자고 말한 건 아닌데. 괜히 말을 꺼냈네, 미안.”
제르가디스가 대답대신 야채스프 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스프를 먹는 입가가 딱딱하게 굳은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어쩐지 어색해진 분위기에 리나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제르가디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쿠, 쿨럭……! 무슨 짓이야, 리나!”
“기운 내, 제르~! 클레어바이블에서 답을 찾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앞으로 클레어바이블의 사본이라면 넘어가버리고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으니 시간을 벌게 된 거잖아?”
“너 말이다, 아무리 말이라도…….”
제르가디스가 말을 잇지 못한 채 어금니를 꽉 물었다. 노기마저 느껴지는 제르가디스의 눈을 보며 리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너를 만나기 직전에, 맙소사, 도적 소굴을 털다가 클레어바이블의 사본을 발견한 거 있지. 네가 본 것과 같은 내용이기는 했지만. ……만약 사본에서 그런 말을 보았다면 믿을 수 있었겠어? 잘못된 사본이라 믿어버리고 다른 사본이나 원본을 찾으러 다녔을 것 아니야.”
“……그야…….”
제르가디스가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의 침묵 후 다시 숟가락을 집어 들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리나가 무슨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탁 퉁겼다.
“그렇지, 이젠 제로스 녀석과 사본을 두고 다투는 일도 없지 않겠어?”
“뭐라고? 하하, 그건 마음에 드는데.”
“그치? 앞으로 유적에서 제로스를 만나면 네가 먼저 사본을 불태워버리는 거야. 으아, 생각만 해도 통쾌하다!”
“어이, 사본은 찾아다닐 필요가 없을 거라며.”
“어라 그런가? 그럼 평생 제로스 녀석의 얼굴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치던가~.”
리나가 까르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옆에서 가우리는 ‘이런 취급을 당하는 제로스가 불쌍하다’고 중얼거리다 또다시 리나와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상황에 뒤섞여버린 제르가디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고는 막 날라져온 음식 하나를 가져갔다.
“이런 식탁은 정말 오랜만이야. 밥맛이 나겠는걸.”
“헤헤, 늘 시끄러운 게 우리의 장점이지.”
“이건 자랑이 아니라구, 가우리. 아, 맞다, 제르! 널 기운 나게 해줄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
리나가 포크로 햄 덩어리 하나를 푸욱 찍어 내렸다.
“뭔데?”
“있지. 언니 집에 갔더니 언니가 어디에서 짐승 하나를 데려와서 기르고 있었거든. 이름은 스포트♥. 근데 그게……, 푸풉.”
“뭐야, 웃지 말고 말을 해봐, 리나.”
제르가디스가 재촉했지만 리나의 웃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가우리가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다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아, 그 회색 멍멍이~?”
“맞아 맞아, 그거. 그런데 개가 아니라 늑대야, 정확히는 늑대 인간.”
“응? 그거 설마……,”
제르가디스가 눈을 찡그렸다. 그의 표정이 오르락내리락 다양하게 바뀌어, 리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의 표정을 감상했다.
“딜기아?!”
덜컹, 제르가디스가 두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그의 앞에 있던 샐러드 접시가 바닥에 나뒹굴고 야채 조각들이 바지에 튀었지만 제르가디스는 그를 알아 채지조차 못했다. 리나와 가우리가 서로를 마주보고는 씨익 웃으며 함께 외쳤다.
“빙고!”
∽
길고 정신없는 식사가 끝난 후, 웨이터가 한숨을 쉬며 어마어마한 빈 접시들을 치우고 있었다. 제르가디스가 후식으로 나온 홍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리나, 아침엔 미르가지아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마족 어쩌고 하는 것 같던데.”
“아, 그거?”
리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말하기 민망한데. 너와 헤어진 이후로도 마족들과 참 많이 얽혀서 말이야. 어떤 사정으로 타리스만도 못 쓰게 되어버려서 나로선 마족에 대한 마땅한 공격 수단이 없어. 그래서 타리스만을 대신할 증폭기같은 것을 빌려왔지 뭐.”
“그래, 잘 빌려왔다. 너희들이라면 언젠가 또 마족을 만날 지도 모르지, 하하.”
“너 그게 무슨 의미야, 제르가디스~?”
“난 너희랑 헤어진 뒤로는 렛서 데몬을 한두 번 만난 게 다거든. 왜, 몇 년 전에 대륙 전체에 데몬이 대량 발생했었잖아? 3년 전이었던가.”
제르가디스가 기억을 되짚으며 덧붙였다. 리나 역시 그 때의 사건이 떠올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랬었지.”
“아무튼 너희와 함께 다니던 때랑 그 사건 이외에는 마족과 만난 적이 없다고. 이게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야.”
리나는 뭔가 항변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로도 ‘마족과 엮이지 않는 보통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리나가 미묘한 불만을 얼굴에 내비쳤지만 가우리는 오히려 활짝 웃음을 지었다.
“잘 했어, 리나. 너랑 함께 다닌다면 앞으로도 마족이 줄줄이 나올 것 같은데 뭐. 키르 뭐라더라 그 녀석도 또 볼 것 같고.”
“으아아아악! 가우리!!”
리나가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짚고 벌떡 일어섰다.
“너! 그런 녀석을, 그렇게 이름까지 불러서 이야기하다니! 그러면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라고 몇 번을 말했어?!”
“이, 이름은 다 말하지 않았잖아~!”
“그거나 그거나! 으아아 난 몰라, 또 나오면 네가 해치워!”
“뭐 대단한 녀석은 아니었잖아. 너무 걱정 마, 리나.”
“그래도 일단은 해왕의……! 쳇, 됐어.”
리나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리나의 얼굴은 상기된 채였다. 제르가디스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어이, 설마 싶지만…….지금도 마족에 쫓겨 다니는 거냐?”
“으으……, 나라고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야. 이런 급의 녀석은 나로서도 몇 년 만이기도 하고.”
“어이, 이런 급이라니 너 설마 샤브라…….”
“말하지 마, 제발, 절대로. 부탁이야.”
“알겠어, 알겠으니 제발 진정해 리나.”
리나가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결국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힘이 풀린 듯 턱을 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아무튼 그 정도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 제르.”
“너 하고 다니는 짓을 보면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같이 싸우겠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제르가디스가 말끝을 흐렸다. 고위 마족의 무서움을 이미 뼈저리게 느낀 그였다. 리나는 그런 제르가디스의 반응에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히 웃었다. 제르가디스가 함께 해준다면 분명 전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말이라도 고마워. 괜찮아, 제르. 그치만 그 놈들이 당장 나타날 것도 아닌데 뭐. 너도 네 할 일이 있는 거고, 무엇보다 내게는 뭐든 썰어버리는 유용한 아이템 1호가 있잖아?”
리나가 홍차에 설탕을 잔뜩 넣고는 휘휘 저었다. 어쩐지 따듯하고 달콤한 것이 먹고 싶은 밤이었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세일룬에서 오는 길이라며. 마족은 세일룬에서 만난 건가?”
찻잔을 젓는 리나의 숟가락이 덜컥 멈춰졌다. 리나가 얼른 아무렇지 않은 듯 찻잔을 저었지만 어색함은 이미 제르가디스의 시야에 포착된 후였다.
“거짓말은 못 하는구나. 설마 아멜리아와 얽힌 거냐?”
“아, 아냐 아냐! 그냥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말이야, 하하하하. 원래 마족이란 게 여기저기 굴러다니잖아?”
“뭐, 굴러다닌다고? 참나, 알았다. 아멜리아는 잘 지내고?”
리나가 계속해서 찻잔을 저었다. 홍차가 살짝 식어버린 탓인지 설탕이 제대로 녹지 않았다. 리나는 손가락 끝까지 신경을 집중했다, 이번에는 숟가락을 젓는 동작에 어색함이 비치지 않도록.
‘정면으로 마주해야한다고 했던가…….’
리나의 머릿속에 미르가지아의 말이 맴돌았다. 대답을 망설이던 리나가 제르가디스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살짝 틀었다. 정면으로 마주하라니, 누구와? 그리고 누가?
“응, 덕분에 이번에도 성에 가서 실컷 얻어먹고 왔지. 병사들이 겹겹이 보호해주는 공주님에게 무슨 일이 있겠어? 무엇보다 그 녀석이라면 마족이 나타나도 주먹으로 때려서 쫓아 보낼 거야.”
대답한 것은 가우리였다. 가우리가 리나의 머리에 손을 퐁 얹고는 머리칼을 살짝 흔들었다.
“하긴 그렇지.”
수긍하는 제르가디스의 말을 들으며 리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클레어바이블 건으로 힘들어하는 제르에게 아멜리아의 일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어.’
아멜리아의 죽음을 알려준다면 분명 제르가디스는 더한 고통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일을 막지 못한 리나와 가우리를, 그리고 그 스스로를 책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후 리나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다 핑계려나. ……내가 말을 못 꺼내겠는걸.’
리나가 설탕이 다 녹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켰다. 각설탕을 서너 개는 넣은 것 같은데 홍차에서는 여전히 쓴 맛이 났다.
“그런데 그 나라는 성왕국이라면서 마족이 왜 이리 자주 꼬인 데냐. 마족의 저주라도 받은 나라인가, 원.”
“저주라면 디루스보다 심한 나라는 없을 걸, 제르가디스?”
“……어이 가우리, 너희들 디루스에서 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온 거야.”
“아하하 너무하는데~. 나 말고 리나한테 물어봐.”
가우리가 웃으며 맥주를 주문했다. 거품이 잔뜩 들어간 맥주가 나오자, 리나는 찻잔을 멀리 밀어두고 가우리의 맥주를 빼앗아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깔깔 소리 내어 웃으며 못다 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들고는 깊은 밤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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