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바람이 좁은 방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공기의 흐름은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귓가에는 계속해서 바람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아멜리아! 아멜리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멜리아아……!!”
그것은 이루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이 이룬 신음소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살아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고깃덩이였다. 차라리 바람이 좁은 복도를 빠져나가며 내는 소리라고 믿고 싶을 정도의 신음소리가 그것에게서 들려왔다. 가우리가 소리를 지르며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썩은 살의 냄새라든지 피의 비릿한 내음 따위는 느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손을 뻗으려는 찰나, 가우리는 자신의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뱀의 모습에 소스라치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손목에 남은 선명한 핏자국을 바라보는 가우리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져갔다.
“이, 이게 뭐야, 리나? 이게 대체 뭐야……?”
가우리가 설마 잘못 본 것일까 싶어 자신의 팔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 그러나 남아있는 핏자국은 선혈의 빛을 띠고 있었다. 갓 도축한 동물의 살점에 닿은 것과 같았던 감촉 또한 다시 떠올라 머리가 쭈뼛해졌다.
리나가 가우리의 떨리는 팔을 붙잡았다.
“전에 함께 봤잖아……. 마족의…….”
저주.
리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단어를 조용히 삼켰다. 이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마족은 아멜리아를 저주하기 위해 이 주문을 건 것이 아니니까. 분명 그녀에게는 아무런 원한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세일룬의 왕녀’가 아닌 아멜리아에 대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리나가 아멜리아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아멜리아의 얼굴 가까이로 손을 뻗자 피로 범벅된 뱀들이 리나의 손으로 달려들었다. 몇 마리의 뱀들이 리나의 손목을 옭아맸고 그 중 일부는 살을 물어댔다. 날카로운 이빨에 피가 튀어 올랐지만 리나는 개의치 않고 손을 아멜리아의 얼굴에 가져갔다. 울퉁불퉁하고 만지면 살점이 떨어질 것 같은 피부였지만 분명 아멜리아였다. 아멜리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우는 것 같았다. 웃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잠시 아멜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은 후 리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두어 발자국, 그녀에게서 떨어진 후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가우리, 물러나 있어.”
“으, 응. 무슨 방법이 있는 거지, 리나?”
“…….”
리나는 대답 대신 두 눈을 감았다.
“악몽의 왕의 그림자여…….”
리나의 두 손에 마력이 모여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가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탓에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 리나인데. 이까짓 것 쯤 해결해줄 수 있을 거야.’ 가우리가 엷은 웃음을 지었다.
“하늘을 가르는 무서운 힘이여.”
리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마족의 저주, 시육주법을 푸는 방법은 오로지 그를 시전한 마족을 죽이는 방법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키르샤가 사라진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때까지 아멜리아를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키르샤를 찾아내 죽인다고 해도 아멜리아에게 돌아오는 것은…… 생이 아닌 영원의 안식.
―금색의 마왕의 힘을 빌린 이 주문……. 지금까지 금색의 마왕의 힘을 이용해 시육주법을 풀려한 자는 없을 거야. 타리스만 없이 완전판의 그것은 단 한 순간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 지, 솔직히 자신은 없어.
“얼음같이 차가운 허무의 칼이여.”
―그러나 불완전판을 시전했다가 저주를 풀기는커녕 아멜리아에게 고통을 줄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난 이 주문을 외울 수밖에…….
리나가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허무의 칼을 불러내는 그 주문이 마치 리나의 몸에 허무를 불러온 것만 같았다. 리나의 눈이 빛을 잃고 싸늘하게 식어갔다. 얼음처럼 변해버린 눈빛에 가우리가 몸을 흠칫 떨었다.
“리나, 너 설마……?”
“그대와 나, 한 몸이 되어,”
한 발자국, 리나가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그곳은 아멜리아의 머리를 바로 위에서 내려보는 위치. 주문을 해제한다거나 적을 섬멸하기 위한 위치가 아니다.
“리나, 그, 그만……!”
“우리 함께 파멸의 길을,”
“그만둬, 리나!!”
―가우리의 외침이 들렸다. ……들렸다? 마치 물 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진다. 아아, 그리고 머리가 울려. 무언가가 머리를 쥐어 잡고 흔들어 대는 것 같아. 이마가 아프다―. 아마도, 머리띠에 박아 넣은 보석 탓이겠지.
“헤쳐나가리니……!”
―이마를 칼로 찌르는 것만 같아. 정말…… 신경 쓰이네. 짜증나.
리나가 머리띠를 거칠게 풀어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간신히 제어되던 마력이 터져 나오듯 부풀어 오르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리나?!”
가우리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휘몰아치는 마력의 장벽이 만들어낸 소음에 묻혀 사라져갔다.
―이건 평소에 보아온 마력 장벽의 수준이 아냐. 나는 또 다시 주문의 제어에 실패한 건가?
리나가 정신력이 소모되어가는 것이 느끼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갈 곳을 잃은 마력이 몸 속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와 동시에 온 몸의 기운이 급속히 빠져나가 이제는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안돼, 이대로는 ……검이 완성되기도 전에 망가져 버릴 거야.
“신들의 영혼조차 베어버리는…… 암흑의 검……,”
나의 마력이여.
힘이여, 생명이여.
손끝을 맴도는 피의 흐름이여.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검이 되어라.
“라그나…… 블레이……드……!”
‘파앗―!!’
모아진 두 손 사이에서 검은 힘이 생겨나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러나 리나가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쥔 순간, 검이 폭발하듯 솟구쳐 오르더니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졌다. 검은 아직도 모자라다는 듯 이리저리 몸부림치며 리나의 마력을 빨아들였다. 그럴 때마다 리나는 모든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에 다리를 휘청거렸다. 커다란 마력덩어리에서 스파크가 이리저리 튀어 오르며 그 끝에 닿는 모든 것을 베어냈다. 리나의 얼굴에도 생채기가 하나 둘 생겨났고 잘려나간 머리카락과 망토 조각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리나! 제발 그만……!”
“?!”
리나의 얼굴 앞을 어른거리던 스파크 한 가닥이 눈앞을 향해 달려들었다. 리나가 급히 고개를 틀었지만 스파크가 눈썹 위를 스쳤고, 핏물이 눈을 따라 흘러내렸다. 가우리가 리나를 말리려 달려들었지만 리나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지금 두 손을 놓으면, 두 번 다시 이 검은 만들어내지 못해. 그리고 지금 이 눈을 감으면, 두 번 다시 아멜리아는…….
리나가 깜빡거리던 눈을 번쩍 떴다. 아멜리아의 일그러진 얼굴 위로 희미한 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붉어진 시야가 물에 씻기듯 묽어져 갔다.
“괜찮아, 이제는 아프지 않을 거야.
……사랑해……, 아멜리아.”
∽
‘콰광―!!’
왕성의 두툼한 벽이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둔중한 돌조각들이 성 밖으로 날아가 떨어지고 흩어졌다. 폭음소리를 듣고 문 밖에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곧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리나와 가우리가 더 이상 그들을 만날 필요는 없었다.
“레이 윙!”
거친 바람이 리나와 가우리를 휘감았고, 병사들의 발걸음은 곧 바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들을 뒤쫓아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리나는 바람의 벽을 풀지 않았다. 마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라 이동 중에도 레이 윙이 몇 번이나 풀리려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리나는 억지로 주문을 외웠다. 바람은 이중 삼중의 거친 형상이 되어 방향마저 제대로 컨트롤되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헉……, 허억……!”
“리나…….”
리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어느 덧 턱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리나는 그 숨소리마저 듣지 않으려는 양 바람을 더욱 거칠게 만들어냈다.
세일룬 시티 외곽의 야산에 도착하자 리나는 이번에야말로 모든 마력을 소진한 듯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가우리도 그 옆에 주저앉았다. 둘은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우리는 여전히 헐떡이는 리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직도 핏자국이 선명한 손목을 바라보았다. 섬뜩했던 그 감촉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리나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 순간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이 검을 들었을 것이었다.
가우리가 리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호흡이 진정되지 않아 리나의 머리가 거칠게 들썩거렸다. 가우리는 리나가 진정될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리나의 머리에 얹고 있었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 리나가 널브러져있는 머리칼을 추스르며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미안해, 가우리. 그치만…….”
가우리가 말없이 리나의 옆에 앉았다. 멀리 세일룬 왕성이 보였다. 비가 오려는 지 구름이 잔뜩 끼어 성이 무척 어둡게 보였다.
“괜찮을까? 저렇게 두고 와도.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으응. 아까 빠져나올 때 보니까 크로펠 씨가 또 엿보고 있더라. 하여간 그 할아버지, 고약한 버릇이라니까. 크로펠 씨라면 알아서 잘 해 주실 거야. ……잿가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리나가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인간 하나가 뭘 할 수 있냐며 의기양양해 했지, 그 녀석. 우리는 불가능해도 크라프 씨라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 거야.”
“크로펠 씨라니까, 가우리.”
정정하며 리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마저 사람의 이름을 틀리다니, 해파리 같으니라고. 리나의 웃음에 가우리가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가우리, 너 혹시 일부러?”
“응? 뭐가?”
“……아냐.”
리나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수 시간째 이어진 긴장으로 온 몸이 무척이나 뻐근했다. 작게 기지개를 켜 보았지만 마력을 과다하게 사용한 탓인지 몸에 기운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나가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키르샤 그 자식, 거짓말을 했어.”
“무슨 말이야?”
“이런 일을 벌인 것이 그라우세라와 같은 것이라고, 식사를 하는 것뿐이라고 했잖아. 그렇지만 그라우세라의 그 행동은 샤브라니구드의 한 조각을 찾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어. 물론 겸사겸사 ‘식사’를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뭔가 꾸미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리나가 멀리 보이는 세일룬 왕성을 노려보았다. 키르샤를 쫓아 보내긴 했지만 브니두라 불린 또 다른 마족, 그리고 혹시 더 있을지 모르는 다른 녀석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지 못하는 한 세일룬에는 또 다시 불길이 번지게 될 것이었다. 혹시라도 마족이 보일까 싶은 마음에 리나가 눈을 부릅떠 보았다. 그러나 피로에 절은 두 눈은 초점이 맞기는커녕 자꾸만 흐려졌다.
‘쿠르릉―’
멀리에서 작은 번개소리가 들려왔다. 짙은 비구름이 빗방울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가우리가 얼굴에 떨어진 빗방울을 훔쳐내며 일어섰다.
“응, 그래. 그렇지만…… 더 이상 우리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 아멜리아의 복수는 했어. 이젠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가우리? 마족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신경 쓸 것 없어. 도라마타 리나 인버스의 명성이라면 마족의 세계에도 충분히 퍼져 있을 테니까, 그런 거겠지 뭐.”
“가우리! 장난치자는 것이 아니잖아.”
리나가 짜증이 섞인 눈으로 가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에 가우리가 씁쓸한 웃음을 한 번 지었다.
“……이렇게 말해주길 네가 원하고 있잖아?”
‘투둑’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졌다.
“가우리……, 내가 잘못한 건 아니겠지?”
리나의 이마에 떨어진 빗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우리는 그런 리나의 머리에 다시 한 번 손을 얹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멜리아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우리들 모두 운이 좋지 않았던 것뿐이야. ……아멜리아와 함께 여행할 때, 참 즐거웠었지. 그러니까 지금 이것이 누구의 탓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래…… 네 말이 맞아.”
가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굵어진 빗방울은 이미 거친 비로 바뀌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안개가 장막처럼 짙어져 세일룬의 모습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오는구나……. 이제 어디로 갈까? 짐을 다 두고 와버렸지만, 노잣돈 따위야 어떻게든 되겠지.”
“……이 육망성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이든 좋아.”
- 2부 종료 -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참 오래걸렸네요. 지나치게 질질 끌어온 것 같아 지루하지는 않으셨을 지 걱정입니다.
기다려주신 분들, 기대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리며
……행복한 결말을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배경음악으로 삽입한 것은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입니다.
레코딩된 지 50여년이 지난 음반에서 추출한 음원으로 저작권에 문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
.
.
2012.9.27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12.9.29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