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가시나무 숲
바람이 휘몰아쳤다. 서로 부딪히는 나뭇가지와 덤불들이 거센 울음소리를 만들어냈다. 하늘까지 감겨 올라간 낙엽 조각들이 마치 결계와도 같이 그 곳을 호위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생명체의 접근을 거부해온 것만 같은 덩굴 속으로 그는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살갗을 파고들려는 양 거세게 달려들었지만 그는 산들바람 속을 걸어가듯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하얀 망토만이 가시에 걸려 작은 생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기도 틀렸나.”
잠시 후, 덤불 안에서 나온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바래다 못해 모래의 색으로 누렇게 물들어버린 낡은 종이가 그의 손에서 바스러졌다. 종이조각은 이내 날아다니는 낙엽들과 함께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은 제피리아였던가. 우선 마을에나 들러서―.”
“어라, 당신. 혹시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라는 인간 아닌가요?”
난데없는 여자의 목소리에 그, 제르가디스가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난 방향, 덩굴 반대쪽의 나무 한 그루 위에에 20대 가량으로 보이는 웬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하얀 피부에 긴 금발을 늘어뜨린 깔끔한 외모였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모양의 하얀 갑옷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갑옷은 어느 나라의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형태. 더욱이 이런 깊은 숲 속에서는 사용자의 움직임을 방해할 것만 같은 괴상한 생김새였다.
“나를 알고 있나? 누구지?”
“흐응. 설마 이 곳에서 만날 줄이야. 아저씨의 말이 맞았네요.”
“아저씨……? 누구를 말하는 거냐?”
제르가디스가 여인을 차갑게 노려보며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대었다. 과거 레조의 마전사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결코 좋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일들을 해왔기에 쌓아 온 원한이라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여인의 말에 의하면 ‘아저씨’라는 남자는 제르가디스가 이 곳에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여인은 이 곳에서 자신을 만난 것이 의외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을 줄곧 찾아다닌 자. 즉 ‘적’일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제르가디스의 서슬 어린 눈빛에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뭐야, 대뜸 칼을 들이밀기에요? 하여간 인간이란 상종할 수 없는 종족이라니까.”
“……그 말은, 넌 인간이 아닌 거냐?”
“보면 모르나요? 흥, 아저씨는 뭐 하러 이런 인간에게 그걸 보여주려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여인의 말에 제르가디스는 머쓱한 듯 손을 검에서 떼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적어도 적은 아닌 것 같았다. 제르가디스가 여인을 찬찬히 살펴보니 금발 너머로 길고 뾰족한 귀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인간은 아닐 테고, 그럼 다른 종족인 것일까? 외형으로 보아서는 엘프로 추측할 수 있지만 마족의 경우 정형화된 외양이 없으니 믿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여인의 말투로 보아 자신에게 살의를 가진 '적'은 아닌 듯 했으니 경계를 조금은 풀어도 될 것 같았다.
“미안하군.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설명해주지 않겠어?”
“그야 당연히― 잠, 잠깐만! 당신, 리나라는 인간에게서 연락을 받지 못했나요?”
“리나? 리나 인버스를 말하는 건가?”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제르가디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곧 이어진 여인의 짜증 섞인 반응에 제르가디스는 질문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맙소사! 아저씨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지 몇 달은 되었을 텐데, 아직도 이 남자 하나를 찾아내지 못한 거야? 하여간 인간이란 큰 소리만 칠 줄 알지 쓸모가 없다니까!”
여인은 한껏 소리를 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씩씩거리는 숨소리에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를 찾아내다니? 리나가 나를 찾고 다닌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최근 내 인상착의를 묻고 다녔다는 사람이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흥, 알 게 뭐예요.”
“알 게 뭐라니, 너무한데……. 그쪽은 날 찾으러 온 것이 아닌 건가?”
“난 그냥 이 숲의 공기가 좋아서 산책을 나온 것뿐이에요. 제르가디스란 인간이 유적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아저씨에게 들었으니까 혹시 하며 기대는 했지만, 당신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라구요. 오늘 만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구요.”
여인이 나무에서 걸음을 옮기듯 한 발을 내디뎠다. 앞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 제르가디스가 당황하며 달려갔으나 여인은 바람을 타는 나뭇잎처럼 너울거리며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이것 참, 놀랍군.”
“걱정해준 거라면 고맙지만 사양이에요. 인간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니까.
뭐, 아까는 아저씨가 신경을 쓰는 인간인 것 같아 인사라도 하려고 말을 건 것뿐이에요. 어쨌든~ 아저씨도 계속 기다리고 계시니까, 이왕 만난 김에 말은 전달해 드릴게요. 그 인간은 헛고생 좀 해 보라지, 후후. 계속 서서 이야기하기도 뭐하니까 여기 앉으세요.”
여인이 나무의 옆에 있던 바위 두 개를 가리키며 그 중의 하나에 걸터앉았다. 제르가디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며 머뭇거리다 결국 여인이 가리킨 바위에 앉았다. 리나를 통해서라도 전달해야만 하는 무언가라. 정보의 내용도, 이 여인과 '아저씨'에 대해서도 딱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는 아니에요. 음 그러니까~ 미르가지아 아저씨가 클레어바이블로 갈 수 있는 입구를 찾았어요. 아마 지금쯤이면 안쪽의 길까지 모두 찾으셨을 거예요. 우리 아저씨는 유능하니까.”
말을 마치고는 여인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나무 위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인이 작은 손짓을 하자 새가 쪼르르 날아와서는 그녀의 손가락 위에 앉으며 노래를 불렀다. 역시 엘프는 여러 자연물과 친한 것인가, 라고 제르가디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그보다…….
“뭐라고?!”
제르가디스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에 여인이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깜짝이야! 얘가 놀라겠어요.”
“미르가지아라면 골드 드래곤의 장로? 그리고 클레어바이블?!그게 정말이야?”
“그럼요. 엘프가 인간에게 거짓말 따위를 할 것 같아요?”
여인이 손을 살짝 들어올려 작은 새와 입맞춤을 했다. 너무나도 평온해보이는 여인의 움직임에 제르가디스는 이 놀라운 소식이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실. 이것은 현실이었다.
“클레어바이블……! 정말 고맙군, 고마워! 이런 곳에서 소식을 전해 듣게 될 줄이야, 생각도 하지 못했어.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하지?”
제르가디스가 여인의 어깨를 붙잡고는 앞뒤로 흔들어댔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여인이 반짝거리는 제르가디스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나, 난 산책을 나온 것뿐이라니까요! 고마워 할 것 없어요. 난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저씨가 당신을 기다리실까봐 걱정되어서 말해준 것이니까. 이, 인간에게 뭔가를 받아봤자 우리 엘프에게는 쓸 데도 없구요.”
여인은 볼을 긁적거리더니 뒤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리며 손 위에서 지저귀고 있는 새를 쓰다듬었다. 넘실거리는 금발 너머로 붉게 달아오른 하얀 뺨이 보이는 것 같아 제르가디스는 풉, 작은 웃음을 지었다. 고맙다는 인사에 이렇게 쑥스러워 할 줄이야. 엘프도 인간과 별 다를 바 없나 보다. 여인은 여전히 변명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흥, 그 위대하신 여 마도사 님이라면 모를까, 다른 인간에는 관심도 없어요. 오늘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었다면 당신을 만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어이, 알겠어. 쑥스러워하기는. 흠흠…… 그러면, 이름 정도는 물어봐도 될까?”
제르가디스의 질문에 여인이 잠시 멈칫 했다. 여인은 손을 움직여 새를 날려 보내고는 뒤를 돌아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멤피스. 멤피스 라인소드라고 해요.”
3부입니다. 사실 3부 4편까지 써 두기는 했는데 설정을 계속 수정할 것 같아 공개하기가 꺼려지네요. 지난 5년여간 열심히 쓰고 지우고 했던 2부와 달리 3부는 저도 첫 발을 내딛는 셈이어서 어렵고 조심스럽습니다. (2001년에 작성한 최초 버전에서는 리뉴얼편 기준 약 6부까지 진행이 되었지만. 그것은 무시합니다 하하.;)
우선 짧막한 프롤로그만 공개해 보아요. 여기까지라면 차후 설정이 변경되어도 큰 변화가 없을테니 :-)
이 프롤로그조차 불확정 상태이므로 린젤에는 공개하지 않고 클도단에만 임시본을 올립니다. 린젤에는 내년 초에 최종본을 들고 인사드릴게요.
그럼 여행 이후, 12월 말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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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9 작성
2012.10.25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임시공개
2013.1.14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