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 O V E L/저주받은 나라

저주받은 나라 3부 - 07

by waitress 2014. 2. 22.

3부、가시나무 숲

 

“여기가 마지막인가.”


리나는 홀로 도시의 구석을 걷는 중이었다. 큰 길을 벗어난 골목이지만 양 옆으로 가게들이 간간이 늘어서 있어 평소라면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만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가게의 문이 닫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이 가득했다. 한산한 거리를 여자 두엇이 종종걸음으로 길을 지나고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리나가 손에 들고 있던 양고기 꼬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으, 이것도 이젠 질린다, 질려.”


양념이 듬뿍 밴 잘 만들어진 꼬치였지만 이미 물려버린 입에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라고 한숨을 내쉬며 리나가 입을 우물거렸다. 일부러 볼을 부풀려 한껏 맛있다는 듯한 과장된 표정을 지어본다.


“이야아, 여기 꼬치 진짜 맛있네…….”


원치도 않는 것을 구태여 한 입 더 먹은 것은 앞에서 다가오던 아주머니 한 명이 제법 가까운 거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거리라면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그녀의 귀에 충분히 들어갈 것이다. 다만 싫은 감정을 숨기려 노력했음에도 얼굴 근육이 뻐근한 것이 어쩐지 썩은 미소가 지어진 느낌이었다.


“여행객인가보네, 아가씨. 양고기 꼬치 정말 맛있죠? 우리 마을의 명물이라우 후후.”

“네, 너어~무 맛있어서 벌써 다섯 개나 먹은 걸요.”


양 손 가득 음식거리가 든 봉투를 안고 길을 가던 아주머니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양고기 꼬치는 이 마을의 자랑거리이자 유일한 관광 상품. 즉 ‘여행객’인 리나로서는 반드시, 그것도 맛있게 먹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리나의 속마음은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고, 다섯 개나? 맛있긴 하지만 그렇게 먹어대면 저녁식사를 못하게 돼.”

“안 그래도 벌써 속이 울렁거리…… 아, 아니에요, 호호. 그나저나 맛있는 것도 많고 참 좋은 마을이네요.”

“그렇지? 천천히 둘러보고 가요. 큰길가에 파란색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이 있는데, 아직 안 가봤으면 거기도 들러보고.”


아주머니가 활짝 웃으며 큰 길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래요? 유명한 곳인가 보네요.”

“그럼. 옆 마을에서 먹으러 오는 사람도 많은걸.”

“아쉽네요, 점심에 가봤는데 문을 닫았었거든요. 휴가라도 간 걸까나……. 언제쯤 문을 열까요?”

“아, 그랬지. 그게…….”


아주머니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 위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글쎄……, 어쩌면 조금 걸릴 지도 모르겠네. 지금은 이런저런 일들로 도시 전체가 조용하거든.”


마치 비밀을 입에 담는 것처럼,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리나가 보일 듯 말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길거리에 사람이 좀 적어 보이는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늦은 저녁, 지친 표정의 리나가 가우리가 머물고 있는 방을 찾았다. 낡은 여관방의 한쪽을 차지한 테이블에는 십여 개의 음식이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놓여 있었다. 리나가 들어오자 테이블 맞은편의 쇼파에 앉아있던 가우리가 일어서며 그녀를 맞이했다.


“뭔가 좀 알아냈어, 리나?”


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우리의 옆에 털썩 앉았다.


“별 소득은 없어. 양 꼬치를 여섯 개나 먹으면서 마을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말을 걸 수 있었던 것도 고작 일곱, 여덟 명 뿐이고.”

“양꼬치?”

“한가한 여행객으로 보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망토에 어깨 보호대까지 다 떼어내도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엄청난걸.”

“하긴. 난 돌아다니지도 못할 정도였지.”


가우리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일룬 시티를 떠난 직후 리나와 가우리는 무작정 제피리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둘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키르샤를 쫓아냈음에도 시작되어버린 전쟁, 그리고 텅 빈 세일룬 시티― 쌓여가는 불안에 리나는 집착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그렇게 지난 삼일동안 도시나 마을을 지나오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불안이 만연하여 어느 곳도 쉽게 지날 수는 없었다. 리나와 가우리는 무기는 물론 갑옷이며 망토까지 벗은 채로 마을을 돌아다녀야만 했고, 이번 성채도시에 이르러서는 그 수준이 더욱 심해져 가우리가 길 위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야 민간인 남자라고는 이 도시에 너 하나 뿐인 셈이니까. 안 그래도 덩치가 커서 위압감을 주는데 말이야, 푸하하.”

“야아…….”

“농담이야. 네 탓은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말구. 어차피 같이 돌아다녀도 소득은 별 차이 없었을 거야.”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고맙지만.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

“새로운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고. 남자들이 갑자기 끌려갔고, 그 즈음부터 세일룬 시티로의 출입은 차단되어버렸고. 그러니 도시가 텅 빈 게 언제부터인지는커녕 그 자체도 처음 듣는 사실. 소문조차 돌지 않았던 걸 보면 세일룬 시티의 출입 차단 수준이 정말 심각했던 모양이야. 요 며칠 동안 지나온 곳들과 똑같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전쟁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리나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그래, 누가 알겠어. 알아도 외지인에게 대답해줄 리가 없지.”

“바로 그거야. 더 캐묻다가는 경비병이라도 부를 것 같아서 말도 제대로 못 꺼냈어. 그나마 알아낸 건 대규모의 부대가 4~5일 전 쯤 이미 이 도시를 지나갔다는 거야.”

“여기에서 제피리아와의 국경까지가 이틀이니까……. 이미 도착했겠구나.”

“……그렇겠지.”


리나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쇼파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천정에 달린 낡은 등이 음울한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우리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접시들이 놓여있는 테이블을 쇼파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일단은 밥부터 먹자. 고생했어, 리나.”

“그래. ……윽, 근데 이거 전부 양고기야? 다른 메뉴는 없었어, 가우리?”

“양고기 요리가 이 마을의 명물이라고 하던걸? 일부러 잔뜩 시켰는데.”

“그야 맛있긴 하던데, 아무리 나라도 하루 종일 양고기만 먹는 건…….”


리나가 볼멘소리를 하며 십여개의 요리를 훑어보았다. 그렇지만 ‘명물’인 만큼 종류도 다양한 양고기 요리를 제외하면 샐러드나 생선조림 두세 접시뿐이어서 리나의 저녁식사로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리나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질릴 만큼 먹은 거야?”

“그래. 진짜 입에서 누린내가 날 만큼 먹었다구. 소득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그렇지도 않으니까 더 보기가 싫어.”


툴툴거리는 리나를 보며 가우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리나 너 말야, 왜 그렇게 집요한 거야? 오늘처럼 무리해서 탐문조사를 하고. 자칫하면 첩자로 잡혀갈 수도 있었어.”

“어? 그야 이상하잖아. 만약 수도를 비우는 게 사람이 쓰는 전술이 아니라면, 마족이 뭔가를 꾸미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걸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응. 사라진 사람들을 찾으면 뭐라도 들을 수 있겠지.”


리나가 양상추 샐러드에 포크를 푹 박았다가 들어올렸다. 그러나 소스에 오랫동안 절여진 야채들은 포크에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두어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리나는 결국 화풀이를 하듯이 포크를 접시 위로 찍어댔다. 울려 퍼지는 소음을 무시한 채 가우리는 식사를 시작했고, 양고기 몇 점을 느긋하게 우물거린 후 대화를 이었다.


“흐음, 그렇기야 하지. 그치만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다고 해도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시끄럽게 울리던 쇳소리가 갑작스레 사라졌다. 여전히 리나의 포크는 비어있는 채였지만 더 이상 애꿎은 접시를 내리찍을 수는 없었다.


“으으……. 여전히 쓸데없이 예리하구나, 가우리.”

“너도. 여전히 그 날카로운 추리라는 걸 하려고 들고 말이야.”


리나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리고, 전쟁의 전술로 세일룬 시티의 사람들을 숨긴 것이라면 이 쪽에는 없을 거야. 아마도 후방……, 그러니까 세일룬의 남쪽에 보냈겠지. 전선에 가까우면 전쟁에 휘말리기도 쉽고 적에게 들킬 위험도 커지니까, 최악의 경우 포로가 될 수도 있고.”

“뭐? 잠깐만, 생각해보니 그렇네. 그걸 왜 이제 말해, 가우리?!”

“그야 네가 물어보질 않았잖아?”


가우리의 태평한 목소리에 리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난 삼일 간을 단 한마디로……. 하여간 넌 정말…… 너무하다니까.”

“난 또 다른 목적이 있는 줄 알았지, 하하.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래? 다시 세일룬 남쪽으로 돌아갈 거야?”

“……그치만 그것도 확실한 건 아니잖아?”

“그야 당연하지. 도시가 아니라 어디 산이나 요새에 데려갔으면 찾을 수도 없을 걸?”


리나가 가자미눈으로 가우리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가우리의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것은 리나 자신뿐이란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리나가 다시 쇼파에 등을 기댔다. 눅눅한 공기에 여러 음식, 특히 양고기와 향신료의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기는커녕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질린다…….”

“양고기가?”


입 안 가득 고기를 우물거리며 웅얼거리는 가우리의 말에 리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 맞아. 그리고 답이 없는 이 상황도 말이야.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잖아.”

“그렇지.”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야. 되돌아가서 세일룬 시티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면―,”

“아서. 그게 다행히도 마족의 짓이 아니라 군의 작전행동이라면, 거길 찾아간 우리는 화살받이가 될 걸.”

“……아으으!”


리나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한참을 더 헝클여놓더니, 그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없다.


“그래, 가우리 네 말이 맞아. 알아도 바뀔 건 없고 위험을 무작정 감수하는 건 바보짓이지. 그래도 말이야, 난 대체 왜 전쟁이 일어난 건지 이것만은 역시 알아보고 싶어. 마족이 뒤에서 수를 썼더라도 결국 뭔가 문제가 있어서 전쟁이 발발한 것이라면 할 말 없는 거지만. 만약 마족들이 얼토당토 안되는 이유를 댄다거나 시비를 걸어서 일어난 거라면…… 그거야말로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되는 거잖아.”

“응. 그건 나도 찬성이야.”


가우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긍정했다.


“이걸 어떻게 알아내야 하나, 으음……. 고명하신 용병 가우리 가브리에프 님,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어, 글쎄. 고명한 용병은 아니지만, 확실한 건 전쟁의 원인이라는 건 군대의 높은 장군급이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세일룬의 군에는 우리가 더 이상 접근할 방법이 없으니까, 남은 것은 하나 아니겠어?”


리나가 펄쩍 뛰어올랐다.


“제피리아! 그걸 생각 못했네. 가우리, 네가 근무했던 제피르 시티의 경비대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오케이, 그것도 좋겠네. 아니면 네 언니는 어떨까?”


갑작스레 들려온 한 단어에 리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으, 응? 언니? 언니는 갑자기 왜?”

“잘은 모르지만 네 언니가 군과 연줄이 있었잖아? 말 한 마디로 나를 한 나라 수도의 경비대에 넣어 줬다고. 그건 사실 보통 일이 아니야.”

“그……야 그렇지. 그치만…….”


리나가 시선을 돌리며 포크를 다시 집어 들었다. 대충 끌어당긴 접시에는 조금 전의 숨이 죽은 야채가 아닌 통통한 고기조각이 있었지만 떨리는 포크의 끝으로는 아무 것도 찍을 수 없었다.


“쫄따구 경비병들한테 들을 수 있는 것은 뜬소문 정도야. 게다가 만에 하나의 경우가 맞다고 해도 말이 통할 만한 위쪽 사람에게 말을 전하기는 어려워. 그러긴커녕 허위 사실을 유포한다고 잡혀가기 십상이라고. 지금 세일룬이든 제피리아든 최소한의 지위에 있는 관리에게 말을 전할 수 있는 건 네 언니뿐일 거야.”

“으…… 언니에게…….”


가우리가 리나의 포크를 빼앗아 대신 고기를 찍어 건네주었다. 리나가 반사적으로 포크를 받아들었지만 손의 떨림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언니는 예전에도 디루스 왕국의 어느 높은 분과 안면이 있었지. 어쩌면 제피리아에도……. ……조, 좋아! 가자, 언니에게!”


더없이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쥔 리나를 보며 가우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국가의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린 듯한 얼굴이지만 그 안에서 떨리고 있는 눈동자는 의연한 얼굴마저도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자 리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리나, 이게 가장 빠른 길이야.”

“나도 알아 가우리. 알려줘서 고마워. 그치만…… 어쩐지 가시나무의 숲을 지나는 것만 같아. 잘 지나왔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여기저기가 피투성이가 되었어.”

“그래도 길은 그 숲 안에만 있으니까.”

“……이래저래 체력을 비축해 두어야 하겠는걸.”


리나가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양고기 요리 접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같은 날. 제피리아 왕성은 처음 세일룬의 공격을 받았던 날처럼 몹시 술렁였다. 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지목된 리나 인버스,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자 전 기사인 루나 인버스가 성을 찾은 것이다. 루나는 거리낌 없이 성의 중앙 계단과 복도를 걸어갔고, 용이 새겨진 은빛 메달로 여며진 망토가 그녀의 빠른 걸음에 휘날렸다. 병사 수십 명이 그녀를 뒤따르며 창 끝을 루나에게 겨누고 있었지만 그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긴 이동 끝에 루나는 마침내 궁정의 문을 마주했다. 경비병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자 루나가 걸음을 멈추고는 짧게 내뱉었다.


“‘은빛 용의 기사단’의 루나 인버스이다. 여왕폐하를 알현하러 왔다.”

“인버스 경, 경께서는 지금…….”

“은빛 용 기사단을 모르는가? 폐하의 명을 받고 입성한 것이다. 폐하께서 직접 날 잡으라 명하시기 전까지는 그 누구의 제지도 불가한 것을 알 텐데.”


루나가 말에 경비병이 난처한 표정으로 루나의 뒤를 쫓아오던 병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도 모두가 경비병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나가 언급한 ‘은빛 용의 기사단’에는 여왕이 직접 명령한 특권이 있었고 그것은 병사들을 움직인 고관의 힘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루나가 다시 경비병에게 말했다.


“고하라.”

“인버스 경…….”


경비병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루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궁정의 문을 향해 크게 외쳤다.


“폐하, 루나 인버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루나가 닫혀있던 궁정의 문을 밀었다. 뒤에서 병사들의 수런거림이 들려왔지만 루나는 이를 무시하며 걸음을 이었다. 문을 열자 길고 커다란 방이 나타났다. 입구에서 시작된 붉은 융단은 방의 끝에 위치한 커다란 책상에서 멈추었다. 책상에서 두 명의 관리와 대화 중이던 여왕 아시리아가 갑작스런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인버스 경? 그대인가?”

“어머나! 오랜만이에요, 아시리아 씨. 우연히 길을 걷다가 커다란 문이 있어 들어와 본 것뿐인데 우연히도 아시리아 씨가 계신 곳이라니, 와우 이거 놀랍네요.”


루나가 굳은 표정을 풀고는 두 팔을 요란스럽게 흔들어댔다. 격식은커녕 품격조차 도통 없어보이는 전직 기사단장의 행동에 아시리아와 대화중이던 관리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여왕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소까지 띤 채로 루나에게 응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연이란 것이 종종 발생하는 법이지. 그래, 리나 인버스에 대한 소식을 좀 들은 것이 있는가?”

“아니오, 일단 며칠을 기다려 보았지만 특별히 기별이 온 것은 없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왕성을 찾았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

“정보를 좀 얻어야겠어서요. 언니 된 자로서 동생이 이리도 험악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선에 가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저로서도 전쟁 중인 세일룬의 진영 한 복판에 들어갈 용기는 없어서, 대신 왕성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런가. 마침 지금 전선에서 올라온 보고를 듣던 중이었네. 와서 듣고 의견을 말해주게, 인버스 경.”


루나가 허리를 한 차례 숙여 예를 갖춘 후 아시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후 아시리아의 채근으로 두 관리가 보고를 계속하였지만 둘은 보고하는 내내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 때 궁정의 입구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은회색의 갑주를 입은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그의 뒤로 세 명의 무인이 무기를 내려놓은 채 궁정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폐하, 인버스 경…… 아니, 루나 인버스는 현재 이번 대 세일룬 전을 일으킨 대역죄인의 주요 참고인입니다. 무례를 범하는 것은 아오나 이 자리에서 루나 인버스를 체포하도록 하겠습니다, 허가해 주십시오.”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 명의 무인이 루나의 주위로 재빠르게 달려갔다. 순식간에 좌우와 배후를 가로막힌 루나가 그들을 보더니 쿡 소리내며 웃었다.


“어라라? 이런 연약한 여자 하나를 상대로 우락부락한 병사를 셋이나 붙이시다니, 아이고 무서워라. 손님접대를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아시리아 씨?”

“글쎄, 나는 그대를 데리고 오라 한 적은 있지만 체포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네.”

“그렇다면 이 분들께 한 마디만 해 주세요. 아시리아 씨의 말씀이라면,”

“인버스 경! 그 무슨 무례한 말인가!”


날카로운 고함소리는 무관의 뒤를 이어 들어온 노관의 것이었다.


“죄인의 몸으로 궁정까지 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여왕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무례함에도 정도가 있는 걸세!”


값비싼 비단으로 온 몸을 장식한 노관은 ‘나는 높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루나를 노려보았다. 루나는 또다시 능청스레 대답하려다 노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사내를 보고는 표정을 다잡았다.


“……여전히 호통부터 치시는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세트 님. 카일 부관도 있었군요.”


카일이라 불린 30대로 보이는 사내가 루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는 망토를 여미고 있는 은색의 메달을 만지작거리다 씁쓸히 웃었다. 그는 루나가 현직에 있던 시절 직접 임명한 부관이었다.


“지금은 은빛 용 기사단의 기사단장입니다, 인버스 경.”

“오, 그렇습니까? 이거 큰 실례를 저질렀군요, 카일 기사단장 님.”

“인버스 경, 어째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루나 인버스, 여왕 폐하의 명으로 잠시 은빛 용의 기사단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카일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루나가 기사단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신을 바라보자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그의 앞에 선 아세트는 여전히 붉은 얼굴에 핏대를 세운 채로 루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나가 아세트와 눈이 마주치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래선 영 어렵겠군요.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폐하.”


아시리아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 대답을 대신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응이었지만 루나는 이미 등을 돌려 궁정의 문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앞을 아세트가 막아섰다.


“그럴 수는 없네. 인버스 경, 알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대는 지금 세일룬의 왕녀 암살을 사주한 용의를 받고 있어.”

“예, 들었습니다. 포로의 증언, 그것도 망가진 비전을 통해 올라온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한 정보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것도요. 그들의 말만을 믿고 저의 발에 족쇄라도 채우실 작정입니까?”

“당연하지! 세일룬의 포로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했네.”

“포로들의 증언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들 모두가 잘못된 정보를 믿고 있거나, 혹은 조작된 정보로 혼란을 주기 위함일 지도 모르는 겁니다.”

“알고는 있네. 이미 사실 확인을 위해 세일룬 왕성으로 사신단을 파견했어.”

“세일룬 왕성……입니까?”


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들이 증거를 가지고 돌아온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무사히 돌아온다면 좋겠군요.”

“뭐라고?”


아세트가 물었지만 루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 지었다.


“그저 혼잣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가 아닌 저의 동생에 대한 정보 확인이 아닙니까? 너무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아세트 님. 무섭습니다.”

“……동생과 그대의 관계는 곧 밝혀지겠지. 정 무죄를 주장하고 싶다면 리나 인버스를 데려와 보게.”

“어려운 주문이시네요. 그것이 어려우니 저 또한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렇게 웃어 넘겨도 소용 없네. 우리 왕국에 연좌제는 사라진 지 오래 되었지만, 참고인으로 그대를 감금하는 정도는 간단한 일이야.”


계속되는 말에 루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런 전쟁에 단서라곤 없으니 저와 제 동생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게 마음 편하실 건 압니다. 물론 저는 동생에게 암살 따위를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원하시는대로 마음껏 조사해 보십시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그리 호락호락 잡혀줄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웃음을 띠고 있던 루나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날이 선 루나의 눈빛에 아세트가 발끈하며 외쳤다.


“지, 지금 누구를 협박하려 드는 겐가?!”

“감히 여왕 폐하 앞에서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세트 님, 잊으셨나 보군요. 저는 은빛 용 기사단의 전 기사단장인 루나 인버스이며, 은빛 용 기사단에게는 ‘세 개의 용의 발톱’이라는 특권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루나가 아세트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고 그에 아세트가 주춤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잠시나마 기세에 눌린 것이 민망했는지 곧 그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하나, 은빛 용 기사단은 제피리아의 여왕 아시리아 젠느 제피리아에 의해서만 선출되고 움직일 수 있다. 하나, 여왕의 명에 의해 움직일 때에는 여왕 이외의 모든 자에 대한 전권을 행사한다. 하나, 여왕의 부름에……, 이건 해당되지 않겠군요. 저는 비록 기사단을 나왔으나 폐하의 명을 받고 그 보고를 드리기 위해 입성한 것입니다. 이 경우 해당 명령을 수행하는 것에 한해 일시적으로 은빛 용 기사단에 복귀하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므로,”


루나가 말을 끊고는 아세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은빛 용의 이름을 걸고 폐하와의 알현을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아세트가 다시 한 번 주춤거렸다. 그리고는 뭔가 반박을 하려 했지만 곧 이를 갈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루나가 정말로 은빛 용의 기사로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자신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련의 소동을 지켜보던 아시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말대로다. 인버스 경에게는 내가 내린 명이 있고 그 보고를 위해 입성한 것이다. 인버스 경은 내빈 숙박동에 머물며 부를 때까지 대기하도록. 대신 성 안을 돌아다니는 것은 금하며, 문 앞에는 감시병을 두도록 하라. 이 정도면 다들 만족하겠지?”


여왕의 말에 모든 불만은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루나가 다시 한 번 예를 취한 후 궁정을 빠져나갔고, 그녀를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호호♡

반년 안에는 돌아오려 했는...데요.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돌아왔으니까 괜찮지요'ㅅ'? (뻔뻔)

.

.

.

2014.02.??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13.12.08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