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키르샤는 알 수 없는 웃음만을 지으며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독기는 점점 짙어져갔다. 금방이라도 덮쳐들 것만 같은 살기에 리나는 이를 가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키르샤와 거리를 벌렸다. 키르샤를 붙잡고 멱살이라도 흔들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주문을 외워야만 했다. 하고 싶은 말도 물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러나 원하는 바를 듣기 위해선 싸우고, 또 이겨야만 한다.
―아멜리아의 형상을 한 자에게.
“하앗!”
가우리가 다시 한 번 지면을 박찼다. 동시에 키르샤가 손을 한번 흔들자 검고 얇은 검이 그녀의 가슴 높이에 생겨났다. 키르샤가 검을 낚아채듯 쥐었을 때, 브러스트 소드의 날카로운 검 끝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챙-!’
“흐응. 이게 고룬노바 이후로 새로 얻은 검이야?”
키르샤가 가볍게 브러스트 소드를 쳐내며 흥얼거렸다.
“시끄러워!”
“딱딱하기는.”
브러스트 소드가 그 주인의 움직임에 따라 잔상과도 같은 옅은 그림자를 흩뿌렸다. 가우리의 검격이 계속해서 쏟아졌지만 키르샤는 여유 있게 막아냈다. 피하기가 어려울 때엔 작은 마력탄들을 쏘아내 검의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가우리가 몇 차례 공격을 가하는 동안 키르샤는 계속 방어만 할 뿐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살기가 맞부딪힌다고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힘이 빠진 공방에 리나가 혀를 찼다. 키르샤가 여유를 부리는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가우리의 검 끝이 눈에 보일 정도로 둔해진 것이었다. 본래라면 이미 끝났어야 할 싸움. 몇 번이나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멜리아’를 눈앞에 둔 가우리는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리나가 타이밍을 계산하며 카오스 워드를 외웠다.
“에르메키아 란스!”
하얀 섬광과도 같은 빛이 가우리와 키르샤의 사이로 날아들었다. 가우리는 미리 눈치를 챈 듯 빛이 닿기 직전 뒤로 뛰어 주문을 피했지만 키르샤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날아오는 주문을 마주보고는 여유 있게 오른팔을 들어 빛을 쳐냈다.
“?!”
“왜, 생각보다 아파?”
그러나 예상외의 충격이었던지 키르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본래라면 장군 급의 마족에게 별다른 타격을 줄 수 없을 주문이지만 방금은 리나가 주문의 구조를 변경해 보다 강한 힘을 담은 것이었다. 키르샤가 얼얼하다는 듯이 오른팔을 흔들었다. 그리고 직후, 왼팔을 휘둘러 리나에게 마력탄을 쏘아 보내며 리나를 향해 달려갔다. 리나가 훌쩍 뛰어 마력탄을 피해내고는 소리쳤다.
“해왕의 장군도 별 것 없네! 왕녀의 모습을 취해 분란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방해꾼 하나 죽일 순 없나 보지?”
리나의 외침에 키르샤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모욕당한 것이 매우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무섭도록 찌푸리기 시작했다. 천진하던 아멜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마녀처럼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이것들이…… 기껏 봐주고 있는데,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뭐야, 명색이 장군님이라면서 읊어대는 대사는 산적 나부랭이보다 진부한데. 그깟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늘어놓을 시간이 있으면 본 모습부터 보여봐! 그게 아니면, 내 친구의 모습을 하지 않고서는 우릴 상대할 힘조차 없다는 거야?!”
리나가 있는 힘껏 소리치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단순한 도발처럼 보였지만 실은 마족으로서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키르샤가 본래의 힘을 숨기고 있는 지금 싸움에서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싸움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키르샤를 해장군의 모습으로 돌려놓아야 했다.
그러나 이는 키르샤가 힘을 숨기고 있다거나 리나 일행을 과소평가하며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거나― 평소라면 전투의 주요 고려 요소가 될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멜리아의 모습을 한 적에게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있을 지, 리나 스스로가 자신이 없을 따름이었다.
리나의 거듭된 도발에 키르샤가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말발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좋아, 그럼 기대에 응해주지.”
그렇게 내뱉고는 키르샤가 낮은 절규를 질렀다. 조금 전부터 울려오던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음울한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이윽고 넓은 집무실을 가득 메울 듯이 퍼져나갔다. 그녀의 힘에 반응하듯 집무실의 온갖 집기들이 흔들거렸고 천장의 샹들리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서로 부딪혀댔다.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독기에 리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이, 리나. 너무 도발하지 마. 안 그래도 무섭던 얼굴이 더 무서워졌잖아?”
가우리가 독기를 헤치고 리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전투가 시작되었던 순간과 같이 리나와 키르샤의 중간에 서서 검을 들어올렸다.
“어쨌든 그대로 싸울 수는 없잖아? 저 자식, 힘을 쓰지 않고 있었다고. 장군이라면 패왕장군 쉐라와 동급일 것 아니야. 게다가 겉모습이 변하면 공격하기에도 좀 더 쉬워지겠지.”
“하긴. 저게 좀 더 낫긴 하겠네. 은발의 아가씨라, 섹시한걸.”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절규 속에서 키르샤의 검은 머리가 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아멜리아를 길게 늘인 듯한 체구였지만 그리 큰 키는 아니었고, 동그랗던 눈은 사납게 치켜 올라가 날카로운 인상으로 바뀌었다. 핑크빛 원피스는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은회색의 갑옷으로 대치되었다. 변모를 마친 후 키르샤가 다시 손을 흔들어 검을 꺼내 쥐었다.
“아, 정정할게. 네 말이 맞아, 가우리. 괜히 말했나보다. 역시 아멜리아보다 못생겼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가보자고, 리나.”
그리고 전투가 재개되었다.
∽
“크로펠 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때마침 돌아온 경비병이 목소리를 높였다. 물 한 잔을 가져다 달라는 명령 아닌 명령에 경비의 임무를 버려두고 다녀왔건만, 눈앞의 광경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왜 크로펠 님이 이런 짓을……?!”
“이, 이보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네?”
오히려 되묻는 것은 크로펠이었다. 병사는 크로펠이 자신을 놀리는가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나 잘못 본 바가 아니었던 듯, 다시 뜬 눈에는 같은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크로펠이 다시 한 번 집무실의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왜……, 이건 잠겨있는 것인가? 아님 열린 거야? 어째서 이런 거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크로펠 님? 그리고 문은 왜 잡고 계시는 겁니까? 왕녀님께서 오후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셨습니다.”
“그건 전해 들었네. 그렇지만 어째서 보초가 한 명 뿐인 건가?”
크로펠의 질문에 경비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왕녀님의 명령이시니까요. 그나마도 모두 물리라고 하신 것을 브니두 님께서 한 명이라도 지키도록 명하셨기에 제가 있는 것입니다.”
“뭐라고?”
크로펠이 잡고 있던 문손잡이를 놓쳤다. 쇠장식이 덜커덩 큰 소리를 내며 빈 복도를 울렸다.
“브니두 님이……?”
“예에. 새벽녘 왕녀님의 귀환이 확인되시고 얼마 안 있어 도착하셨습니다. 지방 근무를 나가셨다고 들었는데 새벽같이 돌아오시다니, 역시 브니두 님은 왕녀님을 끔직히 생각하신다니까요, 하하.”
경비병이 너스레를 떨며 마치 자신이 브니두가 된 것인 양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크로펠의 얼굴은 대조적으로 점점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브니두 님이 벌써 돌아오셨다고?”
“그렇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크로펠 님?”
“도성을 관리하던 병사로부터 브니두 님이 저녁 무렵 세일룬 성도를 나가셨다고 보고받았네. 그리고 성 안에서는 아멜리아 님을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어 브니두 님께는 미처 연락드리지 못했어. 아멜리아 님께서 돌아오신 후에야 전령을 보냈단 말일세!”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급히 돌아오실 만큼 왕녀님께 대한 충심이 강하셨을 줄이야, 역시 대단한 분이십니다. 아, 여기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십시오.”
크로펠의 눈이 크게 떠졌다.
∽
키르샤가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리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둘의 거리는 십여 보 이상 떨어져 있었기에 검 끝이 리나에게 닿을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리나는 외우던 주문을 중단하며 검의 직선방향에서 옆으로 크게 뛰었다.
‘프슥―!’
예상대로 알 수 없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검격에 무언가를 실어 날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흔히 보아왔던 충격파와는 다른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리나는 공격의 성질을 파악하기 위해 칼의 직선방향에 놓여 있던 물체들을 살펴보았다. 어깨 너머의 뒤쪽에는 책장을 비롯한 목재 집기들이 여럿 있었지만 특별히 파손된 부분은 없어 보였다.
‘어떤 공격이지? 사정거리가 좁아 채 닿지 않은 건가? 아니면 인간의 몸에만 반응하는 공격?’
리나가 다시 키르샤에게 시선을 주며 거리를 두자 가우리가 엄호하듯 키르샤에게 달려들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수차례 울리며 서로를 갉아먹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키르샤의 검은 변모 전과 달리 어떠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듯 검신 주변에 옅은 안개 같은 것이 일고 있었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안개가 사라졌다 일기를 반복했다.
“가우리, 조심해! 검에 어떤 능력이 있어!”
“알고 있어! 하지만 ‘이 녀석’에게는 괜찮은 것 같아!”
외치며 가우리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에 키르샤가 큭 작은 신음을 흘리며 주춤했다. 뒤로 물러서며 검을 고쳐 잡는 키르샤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우리의 말마따나 흑도(黑刀)의 능력이 그, 혹은 브러스트 소드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검술 실력은 가우리가 한수 위. 수차례의 공방 후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가우리의 공격이 버거웠던지 키르샤가 뒤로 크게 뛰었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높게 소리를 지르며 힘을 모은 일격을 가우리에게 날렸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보이지 않는 힘이 가우리를 향해 날아갔다.
“핫!”
그러나 키르샤의 공격은 브러스트 소드에 닿자 재가 되듯 가루를 흩뿌리며 사라져버렸다.
“이럴 수……,”
“다이너스트 브라스―!”
그리고 간격이 벌어진 틈을 타 내리쳐지는 리나의 주문. 번개의 다발이 날아들었으나 공격이 막힌 충격으로 키르샤의 반응이 일순 늦어졌다.
“?”
전신에 굵은 낙뢰를 뒤집어쓴 키르샤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키르샤가 가슴을 움켜쥐며 휘청 몸을 기울였고, 바로 자세를 잡지 못한 채로 몇 발자국을 뒷걸음질쳤다. 그 허점을 틈타 가우리가 다시 파고들며 검을 내리쳤다. 키르샤가 흑도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보다는 가우리가 파고드는 속도가 빨랐다. 가우리의 검 끝이 키르샤의 왼쪽 어깨를 길게 베어냈다.
“큭, 젠장!”
키르샤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다가오는 가우리를 막으려는 듯 흑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가우리는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이를 가볍게 피해내었고, 오히려 여세를 몰아 검을 가로로 밀어냈다.
“!”
허공을 벤 것은 가우리였다. 키르샤가 작스레 가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우리가 급히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키르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리나, 조심해! 이 녀석 공간을 이동해!”
리나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키르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키르샤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 리나가 주문을 외우던 자세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리나, 거기……!”
가우리의 외침과 동시에 리나가 옆으로 크게 뛰었다. 키르샤는 리나에게서 조금 떨어진 뒤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 아직 손에 검은 들려있지 않았다. 그러나 달려오며 검을 휘두른다면 그대로 베일 위험이 있었다. 리나가 주문을 쏘아낼 지 주문을 포기하고 숏소드로 흑도를 막을 지 망설이던 순간, 키르샤가 먼저 팔을 휘둘렀다. 허공에 생겨난 검은 안개의 뭉치가 리나의 정면으로 날아왔다.
“읏!”
반응이 늦었다. 리나가 허겁지겁 옆으로 뛰었지만 바로 직전에도 방향을 바꾸었던 탓인지 도약조차 쉽지 않았다. 제법 넓은 범위의 안개를 모두 피하기란 무리였던 듯 망토의 끝이 안개에 닿고야 말았다.
‘스슥―’
낙엽이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낮게 울렸다. 예상대로 안개와 닿은 망토의 끝자락은 사라지고 없었다. 소멸된 부위는 말 그대로 안개가 스며들듯 불규칙한 단면을 보였다. 리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숏소드를 꺼내 방어 자세를 취했다. 키르샤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장군 급이라면 이전에 싸워 보았던 패왕장군 쉐라와 비슷할 터. 제대로 맞았다가는 위험할 것이 뻔하다. 저 안개의 성질을 얼른 파악해야 하겠지만 절대로 맞아줄 수는 없었다.
‘……무모한 짓을 한 걸까?’
제르가디스와 아멜리아와 함께 했던 대 라샤트 전, 그리고 루크, 미리나와 넷이서 연계를 취했어도 어려운 상대였던 쉐라. 그들과 동급일 장군 급의 마족에게 고작 둘이서 덤벼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타리스만의 증폭이 없으니 라그나 블레이드도 사용할 수 없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뒤늦게 이런저런 불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생각들을 떨쳐버렸다. 이미 시작한 싸움이다, 그리고―.
‘절대로 넘길 수 없었잖아?!’
키르샤가 어느 새 바로 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간격은 이미 접근전의 거리. 키르샤가 달려오며 흑도를 내리쳤고 리나가 숏소드를 들어올려 간신히 막아내었다. 그러나 잠시 버틸 수는 있어도 키르샤의 검을 밀쳐내고 공격이 가능할 빈틈을 만들어낼 정도의 힘은 부족했다. 키르샤는 연이은 공격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역시 고위 마족이라 해야 할 지, 비틀거리면서도 힘은 건재했다. 이대로는 복수는커녕 아멜리아의 행방을 묻는 것도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리나가 힘이 부치는 듯 신음을 흘렸다.
“리나!”
뒤늦게 달려온 가우리가 리나와 키르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밀릴 수도 있던 상황에 리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키르샤와 간격을 벌렸다.
키르샤가 혀를 차며 검에 안개를 둘렀다. 그러나 가우리는 안개의 존재를 무시하듯 흑도를 쳐올리며 소리쳤다.
“나에겐 소용없어!”
“젠장, 어째서?!”
키르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몇 합을 더 휘두르다 결국 검에 두른 안개를 거두었다. 그러나 후들거리는 다리로 가우리와 검으로 맞서는 것은 무리였다. 키르샤가 마력탄을 던지며 틈을 메웠지만 어느덧 검 끝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체중을 실어 크게 내리치는 가우리의 일격에 키르샤는 막고 있던 검 째로 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우리의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머리를 향해 똑바로 내려오는 검을 보며 키르샤는 웅크린 몸에 힘을 주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
검이 키르샤에게 닿기 직전, 가우리는 갑작스런 불안감에 공격을 멈추고 뒤로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키르샤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안개는 점점 퍼져나가 이윽고 가우리와 키르샤의 사이에 벽을 형성할 정도가 되었다. 검에 둘러진 안개 정도라면 브러스트 소드로 막아낼 수 있지만 안개가 몸에 닿았을 때에 어떤 작용을 하게 될 지는 미지수. 뾰족한 반격의 수가 없는 가우리로서는 안개의 범위에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우리가 몇 발자국을 더 뒷걸음질치는 사이, 검은 안개의 한가운데에서 빛의 구 수십 개가 쏟아져 나왔다. 목표는― 리나!
“브러스트 앗슈!”
리나가 외우던 주문을 풀어냈다. 주문이 만들어낸 검은 기운과 빛의 구가 부딪히며 파지직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서로 뒤엉켜 소멸되었다. 마침 외우고 있던 주문이 광범위 형이었기에 다행이었다. 리나가 한숨을 돌리려던 순간, 폭발하던 안개의 너머에서 키르샤가 검을 쥔 채로 리나에게 달려들었다.
“역시 또 이렇게 나오는군!”
‘챙-!’
그러나 키르샤의 검은 리나에게로의 공격을 예상하고 달려든 가우리에게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전투가 또 다시 이어졌다.
리나가 둘에게서 떨어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러 합이 오갔지만 금새 끝이 날 것 같지가 않았다. 검술로는 당연히 가우리가 우위였으나 접근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저 검은 안개 덕에 같은 전투 양상이 반복되었다. 물론 키르샤는 계속 소모되어가고 있었고, 멀지 않은 시간 내에 전투는 종료될 것이었다. 그러나……. 리나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시간이 없다. 아멜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사한지. 이 질문은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었다. 이대로 전투가 길어진다면 키르샤는 모습을 숨길 우려도 있다. 그렇다면 아멜리아는 찾아내지 못해.
초조한 마음은 가득했지만 타리스만이 없는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증폭조차 실지 못한, 그것도 고위 마족의 힘을 빌린 주문뿐이었다. 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주문의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의 대결에서 밀린 키르샤가 또 다시 가우리와의 거리를 벌렸다.
“제라스 브릿드!”
“어림없어!”
키르샤의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오도록 궤도를 수정한 주문이었지만 그녀의 검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키르샤가 검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자 빛의 띠와 흑도가 서로 밀어내듯 힘겨루기를 시작했고, 곧 빛의 띠는 반으로 갈라지며 사라져버렸다. 직후 키르샤가 힘에 부치듯 비틀거렸고 가우리가 달려와 두어 차례의 참격을 가했다. 키르샤는 충격파와 마력탄을 이용해 공격을 가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리나가 아쉬워하며 다음 주문을 외우려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잠깐만, 고작 제라스 브릿드에?’
주문의 시전자가 고작, 이라 말하니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분명 공격이 먹히길 기대하며 사용한 주문이었지만 기습이 성공하지 않는다면 큰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쉐라나 라샤트 같은 장군급은 이와 동격의 주문들을 기합이나 검격 한 번으로 쉽게 소멸시키곤 했지 않은가. 그러나 조금 전 키르샤의 방어는 어쩐지 힘에 부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 녀석…….’
한 가지 의문이 리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리나는 이를 확인할 겸 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곤 가우리의 옆으로 돌아가며 신호를 한 번. 가우리가 그런 리나를 흘긋 보더니 곧 눈을 번쩍 뜨며 허겁지겁 키르샤에게 검을 크게 휘둘렀다. 이에 키르샤가 몸을 움츠렸고 잠시나마 틈이 생겨났지만 가우리는 재공격을 가하기보다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키르샤가 그런 가우리를 의아해하며 뒤쫓아 갔다. 그러나 가우리는 속도를 더 올려 달아나기에 바빴다. 입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결계 안, 공기의 흐름이 없는 이 곳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친다면 그것은 주문을 외울 때에 생겨나는 마력의 장벽뿐이었다. 보통이라면 감지하지 못할 수준일 테지만 이번은 어쩐지 큰 탓에 멀리에서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즉, ‘피해야만 하는 것’.
“?!”
“드래곤 슬레이브―!!”
“야아, 리나!!”
리나의 ‘힘 있는 말’과 가우리의 외침, 그리고 키르샤의 소리 없는 경악이 한 데 어우러졌다. 리나의 두 손 앞에 생겨난 붉은 기운이 긴 호선을 그리며 키르샤의 측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키르샤가 재빨리 흑도를 고쳐 잡았지만 반응이 늦은 듯, 붉은 빛은 그녀의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크……, 크아아악!!”
그리고 키르샤의 전신을 감싸듯 붉은 빛이 그녀를 휘감았다. 키르샤가 짐승과도 닮은 울음소리를 내며 절규했다. 주문을 털어내려는 듯 몸부림쳤지만 오히려 불꽃이 타오르듯 빛은 그녀를 더욱 휘감았고, 잠시 후 빛이 사라졌을 때에 그 너머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라졌나. ……윽, 온다! 조심해, 리나!”
가우리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공기가 흔들렸다. 키르샤의 아스트랄 영역에 데미지를 준 주문이 그 여파를 결계 안, 즉 집무실에 흩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리나는 예상했다는 듯 혀를 낼름 내밀며 가우리의 뒤로 달려 들어가 몸을 숨겼다. 얼결에 주문에 휘말리게 된 가우리는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이미 눈앞까지 날아온 주문의 파편을 쳐내느라 불평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브러스트 소드가 가우리를 대신해 길고 구슬픈 소리를 냈다.
소란이 완전히 잠드는 데에는 수십 초의 시간이 걸렸다. 천장과 집기들 일부가 주문에 휘말린 통에 상당한 먼지가 일어 리나가 잔기침을 해댔다. 가우리는 상황이 안정된 것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고, 곧 미뤄두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봐, 리나! 이런 데에서 드래곤 슬레이브 같은 걸 쓰면―,”
“쉿, 불평은 나중에. 키르샤가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도마뱀 꼬리 자르기’가 녀석들의 주 특기이잖아?”
“엇. 그, 그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그치는 리나의 말에 가우리가 입을 다물었다. 말 돌리기, 성공! 리나가 마음속으로 브이 표시를 하며, 자신의 말마따나 실제로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적을 찾아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비록 드래곤 슬레이브가 정통으로 들어갔어도 이 한 방으로 소멸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예상 이상으로 잘 먹혀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이 녀석은 다른 장군 급보다는 약해.’
라샤트는 기합 한 번으로 드래곤 슬레이브와 라틸트를 동시에 와해시켰었다. 다소 방심한 상태에서 먹혀 들어갔다 해도 이 정도로 타격을 입다니, 어쩌면 예상보다 힘의 차이가 더 나는 것일 지도.
결계 안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성의 한 가운데에서 드래곤 슬레이브 따위의 주문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아니, 보통은 결계 안이라면 더더욱 사용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니까― 라고 중얼거리던 찰나 리나의 귀에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리나, 이건 혹시?”
“그래. 아마도…….”
키르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주위를 에워싸던 독기마저도. 들려야 할 상대의 목소리보다 먼저 들려온 것은 바로 창 밖을 나는 새의 지저귐이었다.
“결계가 깨졌어! 그래서 먼지가 이렇게…… 콜록.”
“이런, 집무실 문도 약간 부서져 버렸는데. 윽, 이제 사람들이 몰려오겠어.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아으으, 그렇구나. 크로펠 씨라도 와 줘야 할 텐데. 자, 아무튼. 이젠 끝을 내자고, 키르샤. 얼른 나와!”
리나가 외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키르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독기는 다시 느껴졌지만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죽은 걸까?”
“설마. 명색이 장군 급인데 드래곤 슬레이브 한 방에 소멸까지 가겠어? 조금 전에도 그 녀석에게 타격을 주면 좋다, 정도로 생각하고 사용했을 뿐인걸.”
“그럼 타격을 주지 못하면?”
“그럼 키르샤 녀석이 주문을 와해시키거나 막아낸 것일 테니까. 주변에 피해가 갈 일은 없겠지.”
리나의 설명에 가우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그거 엄청 불안한 방법이었던 거잖아. 그 안에 있는 우리도 위험한 거라구. 저 녀석이 피한다거나 해서 드래곤 슬레이브만 터졌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응? 그야~ 나에겐 가우리라는 든든한 파트너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됐겠지. 에헤♡”
“야, 리나!”
가우리가 리나를 한 대 쥐어박으려 하자 리나가 능숙하게 몸을 빼냈다. 그리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키르샤의 꼬리는 보이지 않았다.
“자, 장난은 이쯤 하고. 이판사판이기는 했지만 나름 계산해서 한 거야. 그러니까 봐줘, 가우리. 그나저나 진짜 안 나타나네……, 키르샤 자식.”
조금 전의 폭음이 새어나갔는지 창 밖으로 몇몇 병사들이 뛰어다니는 광경이 보였다. 이젠 시간마저 적이 된 셈이다. 리나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소리쳤다.
“얼른 나와! 해왕 장군은 숨어서 기습하는 게 아니면 제대로 싸울 힘조차 없는 거냐?”
두 번째의 명령. 정신체인 마족에게 있어 리나의 말은 강제소환이나 다름없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자신은 인간과 싸울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 정신체가 약화, 심할 경우 붕괴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리나가 말을 마치자 집무실 한 쪽 구석의 공간이 일렁였다.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모습은 조금 전의 말쑥한 상태와는 달랐다. 먼지를 뒤집어쓴 듯 헤지고 찢어진 옷. 그것은 핑크빛 드레스였다.
언제나 고민합니다.
.......대체 어디에서 잘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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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6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
2012.10.27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