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연락이 온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보냈던 리나와 가우리는 연락을 받자마자 집무실로 뛰어갔다.
“아멜리아?!”
집무실은 여러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탓에 텅 비어있던 몇 시간 전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아멜리아는 파자마 풍의 품이 넉넉한 드레스를 입고 집무실 안쪽의 쇼파에 앉아있었고, 그런 그녀를 중년의 관리 십수 명이 둘러싸듯 서 있었다. 아멜리아는 마침 의사로 보이는 한 명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리나와 가우리가 상당히 호들갑스런 소리를 내며 집무실로 들이닥친 통에 그들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고야 말았다.
“아멜……!”
“그래서요. 또 궁금한 게 뭐죠? 소화는 아주 잘 되고 있고 속도 불편하지 않아요.”
그러나 아멜리아는 두 사람을 흘긋 바라보기만 하였을 뿐, 대화를 재촉하였다. 그들은 간단한 문진을 하고 있었던 듯 의사가 건강상태에 대한 질문을 하면 아멜리아가 그에 대답을 하는 식이었다. 아멜리아는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듯한 얼굴을 한 채로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마침 자리에는 크로펠도 없었기에 ‘불법 침입자’의 편의를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나와 가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한쪽 구석에 서서 아멜리아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진료가 끝난 듯 의료진들이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아멜리아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 주변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제 됐죠? 난 괜찮다니까요. 기분이 좋지 않아 바깥바람을 쐬러 나갔던 것뿐이에요.”
“하오나 왕녀님, 요 며칠간 식사를 거의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시는 것이―.”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그것보다 집무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것을 물린 기억은 없는데, 여기에 여러분이 계속 계시는 것은 매우 불쾌하네요.”
아멜리아가 강한 거부의 빛을 띤 눈으로 관리 중의 하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질책 어린 시선을 받자 움찔하였지만, 곧 지지 않겠다는 듯 왕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왕녀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왕녀님은 이 나라의 제1 왕위계승자이십니다. 부디 저희들이 보는 앞에서 식사를 해 주시겠습니까?”
“불쾌하다고 분명히―,”
결국 호통이라도 튀어나오려는 찰나, 아멜리아는 리나와 가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언성을 낮추었다.
“좋아요.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죠. 다만 몇 시간이라도 더 혼자 있고 싶은데, 모두 나가주시겠어요?”
“그건……”
“오후에는 집무실 밖으로 나가서 식사든 진료든 다 할게요. 그 정도도 안되나요”
아멜리아의 말은 부탁의 어투였지만 명령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고민하는 듯 하다 이내 머리를 조아렸다.
“분부 따르겠습니다.”
“오후에 브니두 공이 오면 곧장 집무실로 오라고 해주세요. 그 분과 한 가지만 상의하고 나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곧 아침 식사를 가져다 드릴 터이니 반드시 드셔야 합니다.”
아멜리아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들은 걱정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아멜리아에게 예를 표하고는 물러날 준비를 하였다. 병사들이 음식을 치우느라 분주히 움직였고 관리들도 급히 집무실에 오느라 가지고 왔던 겉옷이나 서류 따위를 챙겼다. 그러던 중 노관 하나가 집무실 구석에 서 있던 리나와 가우리에게 눈짓을 주었다. 왕녀의 휴식을 위해 모두 이 곳을 나가라는 것. 그러나 둘은 ‘친구로서 아멜리아를 위로해주어야 한다’라는 핑계를 대며 기어코 집무실 안에 남아있겠다고 우겨댔다. 또 다시 난리라도 부릴 것만 같은 태도에 노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옥에 넣어도 모자랄 두 사람이지만 이들 덕분에 아멜리아의 안위를 알게 된 것이니 크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결국 아멜리아도 둘과 함께 있겠다고 하여 그들을 남긴 채 집무실을 나서야 했다. 노관이 아멜리아의 식사를 챙길 것을 재차 당부하자 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관을 문 밖으로 떠밀었다.
“네에, 네. 저희가 알아서 잘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음식은 천천히 가지고 오시고요.”
“하지만 왕녀님께선 어서 식사를 하셔야……,”
“그깟 밥 한 숟가락보다 마음을 달래주는 게 우선이잖아요? 그래야 밥을 먹던가 하지. 아무튼 어서 나가 봐요.”
“아―, 알겠소. 나갈 테니 너무 밀지 마시오!”
결국 노관은 리나의 고집에 떠밀려 둘을 남겨두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와 함께 모든 관리와 병사들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이 원치 않을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아멜리아는 말없이 집무실의 책상에 몸을 기댄 채로 서 있었다.
마침내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아멜리아와 리나, 가우리 셋만이 남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방관하듯 서 있을 뿐인 아멜리아를 보고는 리나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아멜리아~ 너 말이지, 우리가 멋대로 쳐들어왔다곤 해도 이렇게 모른 척 해도 되는 거야?”
“…….”
“웃……, 정말 화가 났나보네.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가우리.”
“음― 그러니까, 오랜만이야 아멜리아. 잘 지냈지? 하하.”
“그런 말 말고, 억지로 들어와서 그런 건지 아멜리아가 화가 난 것 같다구.”
“그렇지만 난 하루 정도는 더 기다려 봐도 좋을 것 같았는데, 리나 네가 고집을 피운 거잖아.”
“으이그, 내일이 되어도 결국 이런 식으로 들어올 건 똑같잖아! 아무튼……, 흠흠. 예전의 엉터리 사본 사건 이후로 처음이지? 다시 만나는 것이 다른 이유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좀, 괜찮아?”
아멜리아의 대답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소란스럽다 싶을 정도의 리나와 가우리의 대화에도 어떤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고개를 숙이고 둘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생각할 것이 많겠지 싶어 리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우엥, 언니~!”
눈물을 왈칵 쏟으며 아멜리아가 리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리나는 아멜리아가 한 바탕 울음을 쏟아낼 때까지 다독여주다가 아멜리아의 울음이 멈추질 않자 기운을 내라 다그쳤고, 이에 가우리가 그런 리나를 나무라며 울고 있는 아멜리아에게 실없는 한 두 마디의 말을 건넸다. 아멜리아는 그런 둘을 보며 웃음을 되찾았다―
이것은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상상. 연속되는 장면들이 리나와 가우리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것은, 이번 방문의 목적이 필리오넬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에 앞서 아멜리아를 위로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의 행동과 그에 대한 둘의 반응을 예상케 하는 그들의 경험 속에 의심이란 것이 파고들 여지는 없었다. 이번 일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은 리나의 품속에서가 아닌 상당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네, 괜찮아요.”
아멜리아는 조금 전 기대고 있던 책상, 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으……, 응? 그래?”
“국상 이후로 이미 한 달도 더 지났는걸요. 곧 세일룬의 여왕이 될 텐데 언제까지나 침울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응, 그러니. 뭐 그렇다면야…….”
웃음도 울음도 없었다. 아멜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신하들을 대하는 것만 같은 것이어서, 그녀의 절제된 감정을 더욱 절절히 느끼게 할 뿐이었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 지, 대견하다고 해야 할 지. 어리고 철부지였던 아멜리아를 상상하던 리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는 이미 한 나라의 국왕과 다름없지 않은가. 리나는 안쓰러운 한편으로 어쩐지 아멜리아가 멀어진 것만 같은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아저씨의 일은 참 유감이야. 정정하던 아저씨가 이렇게 됐을 줄이야……. 세일룬에서 꽤나 먼 곳에서 있다보니 아저씨가 아프신 것도 몰랐어. 좀 더 자주 찾아왔어야 했는데, 미안.”
가우리도 인사를 건네고는 아멜리아의 옆에 걸터앉았다. 아멜리아는 등줄기를 꼿꼿이 세운 채로 서 있어서 어쩐지 의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우리가 아멜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다. 5일이나 밥도 먹지 않았다면서~ 괜찮은 거야?”
“아아, 그거요? 음식이 영 넘어가지 않아서 남긴 것뿐이에요.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다들 왜 이리 호들갑인지 원. 건강한 게 제 장점이잖아요?”
“그러게, 하하하. 리나는 5일은커녕 다섯 끼니만 굶겨도 나를 잡아먹을 텐데 말야.”
“야아, 가우리~!”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윽, 그……렇지만, 사람을 무슨 식충이처럼 말할 건 없잖아.”
리나와 가우리가 계속해서 툭탁거리는 통에 집무실 안이 제법 시끄러워졌다. 그들이 지금껏 보아왔던 아멜리아라면 이 말다툼을 말린다거나 혹은 한 쪽을 동조하며 끼어들어 한층 더 소란을 피웠을 텐데. 그러나 아멜리아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알 수 없는 아쉬움에 가우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장난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 어쨌든…… 무리는 하지 마라, 아멜리아.”
“네? 무리라니요?”
“……아니야. 이제는 정말 공주님― 아니, 여왕님이구나.”
“그런 셈이죠. 국왕 대리로서 아바마마께서 맡아 오셨던 업무를 제가 보고 있기도 하구요.”
“으응, 그런 것도 있지만.”
아멜리아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우리는 설명 대신 다시 한번 아멜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이제 여왕폐하이니까 밥은 잘 챙겨먹도록 해.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잖아? 크로프 씨도 엄청 걱정했었다구.”
“크로펠 씨라니까, 가우리.”
빠지지 않고 뒤따르는 리나의 정정. 콩트와도 같은 상황에 웃음이라도 나올 법 했지만 아멜리아는 여전히 업무용으로 보이는 미소만을 지었다.
“네에, 걱정해주신 건 고마워요. 그치만 정말 배가 고프지 않네요. 오히려 배가 부른 걸요.”
“그래? 이상한 걸.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전혀요. 조금 전 주치의도 살펴보고 갔잖아요? 별 문제 없다고 했어요.”
“그럼 다행이지만. 어쨌든 1인분 정도는 먹도록 해. 예전처럼 3, 4인분씩 먹지는 못하더라도 말이야.”
가우리가 재차 당부했지만 아멜리아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기만 하였다. 한 마디도 지려 하지 않는 모습에 가우리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으이그, 너 고집이 세졌구나. 이걸 여왕폐하다운 거라고 해야 하나.”
“그러게 말야, 하하. 그 사본 사건에서 보고 벌써 3년이나 지났으니까, 아멜리아도 철이 든 거겠지 뭐”
“사본 사건. 그 때엔 저도 어렸죠. 후후. 이제는 좀 여왕님 같아 보이나요”
“응, 엄청나게 말이야, 아멜리아. 그런데 리나 너는 왜 3년이 지나도 철이 안 든 거냐? ―아이쿠, 농담이야, 농담”
가우리가 리나의 슬리퍼에서 얼굴을 가리며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3년의 세월 동안 업그레이드 된 리나의 슬리퍼 공격기가 날카롭게 가우리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었고, 결국 슬리퍼는 퍽 소리를 내며 가우리의 머리를 강타했다. 제법 아팠는지 가우리가 머리를 감싸쥐며 울상을 지었다.
“농담이라는데도 결국 때리기냐! 역시 리나 넌 철이 덜 들었어~”
“뭐야? 아직 부족한 거지”
“이것 봐, 금새 또― 어라. 잠깐만, 리나. 그러고 보니 사본 사건 때에는 아멜리아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럼 3년보다도 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건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가우리가 여전히 머리를 문지르며, 기억을 떠올리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 때 사본이 있다던 신전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우리 짐이 홀랑 타버렸잖아? 덕분에 우린 밥값도 없어서 쫄쫄 굶게 되었고. 그 때 ‘아멜리아가 있다면 세일룬의 인장으로라도 어떻게 밥을 사먹었을 텐데’라고 네가 울부짖……, 아쉬워했던 기억이 나서 말이야”
“뭔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네. 용케 기억했고 있구나, 가우리”
“헤헤, 그야 그만큼 배를 곯았던 곳도 드물었으니까”
“으이그. 그런데 아멜리아, 아까는 너도 기억한다는 것처럼 말했었잖아”
리나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아멜리아가 지적만 해 주었어도 가우리에게 기억력에서 뒤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멜리아마저 동조하니 의심조차 못했을 수밖에.
“그랬던가요? 다른 곳하고 헷갈렸나봐요”
“……너나 나나 가우리에게 진 것 같은데”
“하하, 그런 거에요”
아멜리아가 멋쩍게 웃었다. 하긴, 3년, 어쩌면 그보다도 더 시간이 지난 것이다.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을 아멜리아가 기억을 못하는 것은 당연할 일일 지도 몰랐다. 리나는 아멜리아의 웃는 얼굴을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아~ 어쨌든 이렇게라도 아멜리아를 볼 수 있으니 맘이 좀 놓이는데? 상당히 억지로 들어온 거라 미안하긴 하지만 말야.”
“그러게. 못 보고 돌아갔으면 상당히 아쉬웠을…… 맞다! 중요한 게 있었지!”
문득 생각이 떠오른 듯, 가우리가 갑작스레 소리쳤다. 가우리는 동시에 걸터 앉아있던 책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긴장한 듯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비장감을 지닌 목소리에 리나도 긴장이 옮은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뭐, 뭔데, 가우리?”
“아멜리아, 이미 들었을 진 모르겠지만…….”
“네?”
“우리가 성에서 난동을 조금 부렸는데 말이야. 설마 리나랑 나를 감옥에 보내는 건…… 아니겠지?”
리나가 말없이 달려가 가우리를 지근지근 밟아댔다.
2003.03.08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12.05.02 리뉴얼,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
2012.05.12 린젤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