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이는 말]
콰앙---!!!
커다란 폭음을 내며 제피리아 외곽의 대지가 패인다. 제피리아 군이 폭발의 여파를 피하려 흩어진 틈을 타, 폭음과 함께하듯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밀물처럼 들이닥친다. 그들의 양 손을 가득 채운 것은 칼도 창도 아닌, 곡괭이와 삽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는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춘 병사보다도 거칠고 광적일 정도로 드세어 제피리아는 고전을 면키 어려웠다.
갑자기 밀려드는 공격에 제피리아 군은 반격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은 너무나도 갑자기 시작되어버렸기에, 전쟁의 준비가 되지 않은 지금의 제피리아는 방어만으로도 급급했다.
전쟁의 시작은 급히 갈겨 쓴 단 한 장의 서간으로부터였다. 난데없는 중립국가 세일룬의 선전포고. 그 이유 역시 믿을 수 없을 만한 것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전쟁은 이미 시작되어 버렸다.
매우 사적이면서도 또한 공적인 전쟁의 이유. 그것은…….
저주받은 나라
1부 : 암살
1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세일룬의 일방적인 선전포고― 이것은 전쟁 발발의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대사건이 되었다. 중립국이자 상호 오랜 세월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세일룬과의 전쟁이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기에, 제피리아로서는 이 선전포고를 실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세일룬이 보내온 서간은 격식을 전혀 갖추지 않고 있어서 그 내용을 신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건이 알려진 직후, 급히 소집된 제피리아의 고관들은 수 시간동안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선전포고가 과연 사실인지, 적대국의 악질적인 이간질책 혹은 혼란 유도는 아닌 것인지 그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주안점이었으며 병력의 배치는 '만일을 대비해 국경의 경비를 강화한다'의 수준에서 일단락 지어졌다. 그러나 서간이 늦은 저녁 즈음하여 도착하였기에, 한밤중에 대책회의를 진행하며 외교적 관계의 무언가를 확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덕분에 급박한 사안임에도 일의 처리속도는 상당히 더딜 수밖에 없었고 국경 근처의 수비대에게 연락을 넣는 것조차 쉽지만은 않았다.
“국경에서 봉화가 피어오른 것이 사실인가?”
제피리아의 발빠른 대처를 어렵게 한 원인은 또 다른 것이 있었다. 각국의 군에서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상대와 환영을 통한 대화를 할 수 있는 통신용 주문, ‘비전’의 도입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서로 의식을 동조할 수 있는 마도사 사이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또한 원거리 간의 통신이므로 비전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한 특정 결계가 필요했으며, 국경―수도 수준의 거리에서는 중계 또한 필요했다. 즉 비전 마법의 사용이 가능한 수십 쌍의 국가 소속의 마도사와 그 지원 시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제피리아에서는 국경에서부터 왕성에 이르는 비전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근 한 달 간 통신이 원활하지 않았으며 이윽고 이틀 전부터는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 이르렀다. 마도사들은 ‘아스트랄 계에서의 방해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침범이 불가능한 영역이므로, 군은 원인을 결계가 설치된 비전룸이라 보며 보수공사를 해오던 중이었다.
세일룬이 제피리아 국내의 이러한 사정을 알았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비전의 사용 불가로 인해 제피리아는 원시적 통신 수단으로 이 비상사태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십여 년 전 비전을 도입한 이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봉화(烽火)를 다시 피워 올려야 했으며 발 빠른 말에 전령을 태워 국경지대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봉수대(烽燧臺)를 지키는 병사가 십 년 만의 봉화에 제 때에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병사 개인의 직무 태만을 언급할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접해보는 업무에 병사가 제대로 반응을 할 것인지는 미심쩍기 그지없었다. 설령 제대로 진행된다 해도 왕도에서 국경에 도달할 때까지 수 시간은 걸릴 봉화에, 제아무리 발이 빨라도 속도와 체력의 한계로 사흘 가량이 소요될 파발마. 마치 한밤중에 외교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관료들의 처지처럼, 제피리아는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두 팔만을 휘저어야만 했다.
“잘못 확인한 것은 아니겠지?”
자국 내에서의 체계도 채 잡히지 못한 채로 그렇게 어수선한 밤이 지나갔다. 간신히 여왕의 명령이 각 부서로 하달되고 세일룬을 향한 사신이 말의 고삐를 움켜잡을 즈음― 제피리아는 세일룬의 대군이 이미 제피리아의 외곽에 집결해 있다는 의미의 봉홧불을 망연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동이 터오르는 이른 새벽, 제피리아가 제대로 된 방어선조차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덧 전쟁은 시작되어버렸다.
폐회를 맞으려던 회의는 결국 연장되었다. 당면 주제는 갓 발발한 전투에 관한 것. 이유가 어떠하든 전쟁이 시작된 마당에 선전포고의 진위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대회의실로 옮겨져 모든 문무 고관이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킨 세일룬의 목적은 무엇인지, 이 전쟁을 총 지휘하는 장군 또는 왕족은 누구인지, 군대의 수는 얼마이며 군량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어느 수준의 교섭이 가능할 것인지. 알아내야 할 것은 산더미 같았지만 중앙에서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 이를 알아낼 방도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용 가능한 전력을 최대한으로 돌려 피해를 막아보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이었다. 결국 두 번째 회의의 모든 관심은 세일룬이 아닌 자국의 전력의 편성과 분배에 치중되었고, 총 열 시간이 넘도록 지속된 회의를 통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인가……?”
‘이용 가능한 전력’이란 것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세일룬은 중립국을 표방해왔고 오랜 기간 제피리아와 우호 관계에 있었기에 그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의 수가 다른 국경면에 배치된 것에 비해 매우 적었던 것이다. 다른 인접국인 칼마트 공국, 에르메키아 제국과의 국경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만 전쟁 발발의 원인을 알 수 없는 현 상태에서 협공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두 국가에의 국경 수비대는 그대로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군 병력은 대 세일룬 전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에 가까웠으며 국경까지의 거리상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어서 당장의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즉,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이라 할 만한 것은 각 지역의 주둔군 뿐. 그러나 이들이 급히 이동한다고 해도 세일룬과의 국경이 상당한 외곽지대에 위치한 탓도 있어 세일룬의 기습 아닌 기습을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비전이라는 신속의 통신망을 잃은 제피리아로서는 이동에만 이틀 이상이 걸릴 전령, 혹은 수 시간 내에 도착하나 정보 수취 여부의 확인이 불분명한 봉화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방어선이 함락되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전투 개시 이후, 머나먼 변경에서 봉화를 타고 도착한 최초의 보고는 그야말로 최악의 것이었다. 패전의 보고에 제피리아의 여왕 아시리아 젠느 제피리아는 분노에 가득 찬 한탄을 내뱉었다.
“예, 폐하. 그리 보고 받았습니다……. 이제 한두 시간 정도면 비전룸의 보수가 모두 끝날 것이라 하오니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허어. 아무리 갑작스런 전쟁이라 해도 제피리아가 패퇴하다니, 이 무슨 추태인지……! 세일룬과의 국경이 무너지면 칼마트 공국, 그리고 에르메키아 제국과의 국경지대도 안심할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밀리는 것은 국가 전체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어. 반드시, 막아내야 하네!”
여왕이 힘을 주어 말을 끊었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짧은 대답으로 응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왕성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전쟁이다. 아니, 지시를 내리기는커녕 전선의 상황조차 제대로 알아낼 수 없는 상태였다. 봉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적군의 접근’과 ‘전투 개시’, 그리고 뒤이은 ‘패배’라는 짤막한 정보 뿐. 그나마도 봉화의 전송에 시간이 걸릴 테니 이는 수 시간 전의 상황일 가능성도 있었다.
새벽녘 세일룬이 국경 근처에 포진해있다는 보고를 들은 즉시 장군들과 중앙군의 부대를 출병시켰으나 그들이 도착하는 데에는 최소 십여 일 이상이 걸린다. 선전포고를 들은 직후 보낸 전령이 제때에 국경 근처의 부대에 도착한다면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했겠지만 그조차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국경 근처의 수비대가 긴급 상황의 봉화를 보았고,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각자의 판단으로 움직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비대가 합류하였다 하여도 상당한 대군을 이끌고 있을 그들에게 수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여왕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전선의 상황은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최초에 있었던 부대는 전멸, 그 후속 부대도 궤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 이후 도착한 몇 개의 부대가 합동 작전을 펼쳐 전열의 혼란은 다소 잡았지만 고전 중이며 조속한 증원 필요. 아마도 이러한 상황일 테지.
여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붉은 망토 위로 갈기처럼 장식된 하얀 털이 거칠게 흔들렸다. 여왕은 오랜 회의로 헝클어진 회색빛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리고는 쌓인 피곤을 풀려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비볐다.
그동안 고관들은 여왕의 눈치만을 살피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침묵이 지속되자 여왕은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넓은 대회의실에 모인 모든 자들을 훑어보았다. 사십대 후반의 젊다면 젊은 나이의 군주, 게다가 여인의 몸이었지만 그녀가 발하는 위엄에 백발의 노관조차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때마침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중년의 장군 한 명이 들어섰다. 그는 군부의 상황실에서 비전룸과 봉화 등 정보에 관한 부분을 담당하는 자였다. 여왕의 시선이 자신들에게서 떠나 그를 향하자 모두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여왕에게 간략한 인사를 하고는 곧 입을 열었다.
“폐하, 비전룸의 보수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원인은 국경 지대의 비전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인가, 데오폴트 공? 그렇다면 세일룬이 의도적으로 그를 망가트린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통신 자체가 원활하지 않다고 합니다. 마도사들의 의견대로 ‘무언가’의 방해를 받았을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
“‘무언가’라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 하지 않았나? 아, 원인은 추후에 밝히기로 하세. 통신이 ‘원활하지 않다’는 말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는 것이겠지. 전선에서 올라온 내용이 있는가?”
데오폴트 장군이 긍정을 표하며 상체를 한 번 숙였다. 통신 재개라는 희소식을 들고 온 그였지만 앞으로 말하게 될 것들은 대강의 상상이 가능한 것이었기에, 그와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단발적인 음성 통신은 가능했습니다. 다만 영상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기에 그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비전을 통해 올라온 전선의 상황은―…….”
그의 보고를 끝으로 회의실 내부에는 한참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며, 또한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모두는 말을 잃고 전달된 정보를 머릿속에서 해석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광적일 정도의 공격―. 패배의 봉화를 본 시점에서 세일룬의 기세가 높을 것은 이미 짐작한 바였으나 이는 예상의 정도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들은 공격 이외에는 다른 모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 병참부대가 도착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퇴로와 보급로를 확보하지도 않은 채 공격을 강행했다고 하였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만 있을 뿐인 공격은 분명 세일룬 스스로에게도 타격을 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손해를 무시한 채 달렸다고 한다. 마치 배수의 진을 친 최후의 공격처럼.
반면 이상한 점도 있었다. 기세는 그 어떤 군대보다도 드세었으나 군인 특유의 획일적인 움직임이나 전열의 유지 등이 관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간의 차이가 있는 부분이니 판단을 하기는 어려우나, 상부의 명령에 따른 통제 수준이 상당히 미약한 것으로 보인다 하였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기본적인 창과 칼이 대부분이었지만 곡괭이와 삽, 그 밖의 농기구를 비롯해 언월도나 철구와 같은 다소 특이한 무기를 들고 있는 병사도 여럿 보인다고 하였다.
“……정보는 사실인 것 같군. 세일룬이 비전룸 어딘가에서 방해를 넣어 정보 조작을 했다 해도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내용이 아닌 것 같다.”
“상황실에서도 그리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앙에서 무언가를 전하기에는 정보 유출의 우려가 남아있습니다.”
여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비전은 의식을 동조할 수 있는 마도사 사이에서만 가능한 마법이었기에 제3자가 비전을 대신 시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일 인물간의 통신이라 할지라도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왕성에서 국경에 이르기까지 여러 비전룸의 중계를 거치는 동안 단 한명이라도 외부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에 놓여있다면? 지령의 내용을 틀어 거짓으로 전달하거나 혹은 외부 세력에게 흘려보낸다면? 정보가 새어나감은 물론 은밀한 작전의 수행이 오히려 스스로의 목을 죄게 될 것이었다.
잠시 후, 여왕이 결심을 한 듯 감았던 눈을 떴다.
“지금 즉시, 각 지역 주둔군을 국경 지대로 보내도록 하라. 비전의 사용을 허가한다.”
“폐하?!”
“제피리아 국내이다. 원군이 올 것쯤은 세일룬도 예측하고 있을 터. 진군 루트와 시간, 부대의 규모 등은 주둔군의 지휘관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하, 하오나 비전룸이 세일룬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너무도 높습니다, 폐하!”
“그리 걱정 말게나. 재상은 이 제피리아의 군대가 그리도 약하다고 보는가? 연계가 어렵다고는 하나 다행히도 세일룬과의 국경지대는 비교적 좁은 면적이다. 세일룬의 진군 루트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 우리의 군대라면 능히 해낼 것이야.”
회의실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여왕은 많은 이들의 불만을 모두 묵살한 채 데오폴트 장군에게 질문을 던졌다.
“데오폴트 공,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네. 세일룬과의 접촉은 어찌 되었는가?”
“전령을 두 차례 보냈다고 합니다만, 연락이 두절되었다 합니다…….”
데오폴트가 말끝을 흐렸다. 전령의 행방은, 세일룬의 이상하다 싶을 정도의 기세를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전령조차.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세일룬은! 어찌되었든 이 인장조차도 찍혀있지 않은 서간 한 장 따위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어……!
다시 전령을 보내 세일룬 군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중앙에서도 세일룬 왕도에도 사람을 보내겠네. 본국까지 오가려면 수 일이 소요되겠지만, 격분되어있을 군 한 가운데로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지도 모르지.”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전령을 보내도록 할까요?”
“그리하라. 부대를 동반하여 공격에 철저히 대비토록 하게.”
“폐하, 그 또한 비전을 이용하시려는 겁니까? 너무도 위험합니다!”
여왕의 명 이후 회의실은 또 한 차례 웅성거렸다. 여러 고관들, 특히 걱정이 많은 노관들이 발언을 하였다. 노관들은 조금 전의 원군 수배에 이어 또다시 비전을 사용하려 하는 여왕에게 불만을 숨기지 않고 반대 의견들을 내었다. 여왕은 대답 없이 이를 듣다가 결국 답답하다 듯 토해내었다.
“전령을 보내는 것에 어찌 위험을 말하는가? 세일룬이 우리 측에서 전령을 보내는 것을 미리 알아낸다면 전령에 걸맞은 대응을 하겠지. 물론 전령을 맞이할 마음이 없다면 다르겠지만 말일세. 이는 정보가 누출되지 않아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야. 우리로서는 손해를 볼 것이 없네. 오히려 전선에서 두 번의 실패로 접촉을 꺼려하고 있다면, 중앙에서라도 재촉해야만 하네.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네.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결국 내려쳐진 호통에 모두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소란이 가라앉자 여왕은 재차 전령을 보낼 것을 명하였고, 데오폴트는 회의실 밖으로 급한 걸음을 옮겼다. 노관들은 비전룸을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불안한 듯 바라보았지만 여왕의 서슬 어린 눈빛에 걱정을 접어야만 했다.
회의실 안은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무언의 술렁임 속에서 외교 담당의 관리 하나가 쭈뼛거리며 발언했다.
“폐하. 세일룬 시티로 사신을 보낸다 해도 세일룬과의 국경을 넘기는 어렵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그, 그것이……, 칼마트 공국을 경유해야 할 듯 합니다.”
“그런가. 국왕께 양해를 구해야 겠군, 서류를 가져오게.”
지시를 내리는 여왕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여왕도 노관들의 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통신망은 복구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의사 전달만 가능할 뿐, 세세한 지령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전의 보안이 불안정한 것이 사실이라면, 설령 진군 루트와 시간을 지정하지 않았다 해도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을 부대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전황을 알아도 중앙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여왕의 온 몸을 휘감았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해야 이런 것이라니, 여왕은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제피리아가……, 제피리아가 보낸 암살자가 아멜리아 윌 테슬라 세일룬 왕녀를 살해하였다? 설사 제피리아 인의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라 해도, 그것이 이런 식으로 전쟁으로 이어지다니, 후우…….”
여왕이 책상의 한켠에 밀어두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종이는 왕실에서 쓰던 것인 듯 두툼한 두께로 값비싸 보였지만 이곳저곳에는 심한 구겨짐과 얼룩이 남아 있었다. 또한 그 위에는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것만 같은, 급하게 휘갈겨진 글씨가 있었다.
「 세일룬의 제2왕녀이자 제1왕위계승자인 아멜리아 윌 테슬라 세일룬이
제피리아의 암살자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우리는 제피리아를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
장문의 글이 서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지만 서간이 전하는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제피리아에 대한 비방에 가까운 말들과 함께 왕녀를 잃은 슬픔과 한탄, 분노만이 쓰여져 있었다. 서간에는 국왕 또는 그 대리인의 인장조차 찍혀있지 않았으며 필체는 갈겨쓴 것이었고 문장 또한 졸렬하기 그지없었다. 국가 간의 서간이 지녀야 할 자격은커녕 욕설이 섞여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정도로 천박한 수준의 것이었기에, 제피리아로서는 이 서간이 전하는 선전포고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혼돈과 참혹한 패배로 이어졌다.
서간에는 암살자가 누구인지, 암살자를 제피리아 왕국의 차원에서 보낸 자인지 아니면 단순한 개인적인 원한인지, 어떠한 부가적인 설명도 없었다. 오히려 세일룬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추측될 정도였다. 그저 제피리아가 세일룬의 왕녀를 암살했다는 믿음 하나에 세일룬 군의 분노가 제피리아에 쏟아져 내렸고, 제피리아는 영문 모를 싸움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을 것이었다.
이로써 성왕국 세일룬의 젊은 왕― 필리오넬 엘 디 세일룬 전 국왕의 병사 소식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두 번째의 부고는, 국경을 마주하는 인접국이자 우호국인 제피리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언하건데 나는 여왕으로써 세일룬의 어린 왕녀에게 단 한 번도 적의를 표한 적이 없다. 이 아시리아 젠느 제피리아의 이름으로 암살이 지시되었다면, 나를 사칭한 자는 반역의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해도 할 말이 없겠지.
나의 이름을 둘러댄 것이 아니라도……, 혹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왕녀의 살해에 관여한 자가 있는가?”
여왕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러나 이런 노골적인 질문에, 이런 식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답할 자였다면 암살을 지시할 배짱 따위 있었을 리 없다. 여왕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는 앞으로 있을 처벌에 대한 엄포나 다름없었다. 다만 아주 작은 반응이나마 보이는 자가 있을까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회의실에 모인 모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때 여왕의 시선 끝에 닿은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매우 수선스럽게 양손을 움직이며 떠들어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만일 제가 암살을 지시했다면, 이런 식으로 제피리아의 흔적을 남기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그럴 말을 할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크 님.”
“그렇지만 어느 암살자가 자신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를 알릴만한 짓을 하겠습니까? 붙잡혀서 고문을 당한 것이 아닌 이상 암살자씩이나 되어서 그런 허술한 짓을 할 리는 없겠지요. 오히려 범인이 제피리아인 척 하였지만 실은 다른 나라의 간계일 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레이크라 불린 남자는 다른 이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계속 말했다. 그의 의견은 분명 틀린 것이 아니었지만 전쟁이 한창인 현재의 상황에 적합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만일 내가 암살을 지시했다면’이라는 말은 금기 중의 금기가 아니었던가. 레이크의 말에 여왕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맞는 말이야. 누군가 제피리아의 이름을 사칭해 세일룬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려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진실은 어떨지 모르는 것이지. 오히려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려 하는……, 레이크 공. 그대를 반대로 의심해 볼 수도 있는 것일세.”
“폐, 폐하?!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왕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자 레이크는 기분이 좋은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 사이 공격의 방향은 자신에게로 바뀌어 있었다. 레이크가 매우 놀란 듯 소리쳤으나 여왕은 이를 무시한 채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냥 해본 말이네, 너무 놀라지 말게나. 레이크 공의 말마따나 만일 그대가 그러했다면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겠지.”
“그, 그렇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대를 모르는 바 아니니 그렇게 놀라지는 말게나. 그렇다 해도 상황이 상황이니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폐하?!”
레이크의 외침은 이번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왕은 대답 대신 눈을 감고는 피곤한 듯 몸을 의자 깊숙이 파묻었다.
여전히 수선스럽게 스스로를 비호하려는 레이크와 그를 말리는 사람 몇 이외에는 모두가 여왕의 침묵에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깐의 시간을 사이에 둔 후 여왕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난 믿는다. 레이크 공, 그리고 여기에 있는 모두를.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재상에서부터 가장 말단의 병사에 이르기까지, 제피리아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자들 중 아멜리아 왕녀의 암살을 지시한 자가 정말로 있다면……, 난 나의 모든 힘과 권력을 동원하여 그를 처단할 것이다.”
단어 하나라도 흘려들을 수 없는 그 무게에 공기마저 짓눌려 아무런 소리도 흐르지 않았다. 레이크는 얼굴이 곧 새파랗게 질려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죄가 들통 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의심 아닌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여왕의 서슬어린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왕이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질려있는 레이크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그 뿐으로, 시선은 곧 모두를 향해 정면으로 옮겨졌다.
“나 역시 레이크 공의 말처럼 차라리 다른 나라의 모함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네. 혹은 제피리아와 관계없이 세일룬의 몰락을 바라는 곳이 있을 수도 있지. 우리는 운이 없게도 그에 말려든 것뿐이고.
레이크 공, 그렇게 단언할 수 있던 것은 어딘가 의심 가는 곳이라도 있었기 때문인가?”
“예……, 예! 제가 보기에는―,”
레이크는 잔뜩 겁먹은 듯한 말투로 더듬으며, 그러나 약간 흥분된 상태로 말을 이었다. 레이크의 뒤를 이어 여기저기에서 이번 전쟁을 조작하였을 것으로 의심 가는 국가의 이름, 타국의 대신과 영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 중에는 간간이 제피리아의 신하도 섞여있었으나, 제피리아의 고위직 대부분이 참석하고 있는 자리인 만큼 직접적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껄끄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교묘히 이름을 숨겨 말하려하면 당사자 또는 그와 친분이 있는 자가 반박을 하고 나서 이야기가 금새 수그러들곤 했다. 그러나 이미 몇 명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거론되었고, 이는 모두 여왕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그렇게 여러 의견이 오고가며 한 시간여를 이어갔다. 시작은 레이크의 실언이었지만 회의는 결국 암살, 또는 국가간 이익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재점검한다는 원인규명을 목적으로 제대로 진행된 셈이었다. 만족을 하기엔 부족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진전이 있었다.
추측에 기반한 탁상공론이 슬슬 한계로 치달을 즈음, 여왕은 조용히 오른손을 머리 높이로 들어올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대신 한 명이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여왕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며 예를 갖추어 상체를 숙였다. 모두는 자리에 앉은 채로 여왕과 대신의 움직임을 주목하며 토론을 멈추고 침묵하였다.
“이 건에 대한 토론은 이제 충분한 듯 하다. 덴버스 공,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거론된 자들을 위시하여, 그밖에 제피리아와 적대관계인 국가와 영주들, 그리고 세일룬과 적대관계에 있거나 또는 세일룬의 몰락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의 동태를 은밀히 조사해보라. 무언가를 노린 것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이익이 이번 암살을 꾀한 자에게 주어지겠지. 우선은 이것부터 알아보도록 한다.”
“네, 폐하.”
짧은 대답과 함께 덴버스라 불린 중년의 남자는 지체 없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와 같은 부서에 소속된 관리 두 명이 함께 방을 나갔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럽던 회의실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여왕은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뜨며 모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고, 모두는 긴장을 애써 감추며 여왕의 시선에 정면으로 응했다. 여왕의 눈을 피한다면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기에, 상당한 부담이 있음에도 그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시선이 닿자 여왕은 끝내 눈을 찡그렸고, 애꿎은 마지막의 사람은 움찔 놀라며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긴장한 그의 반응에 여왕은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진실로 제피리아의 누군가가 무언가의 목적을 위해 세일룬의 왕녀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비록 국가차원에서의 지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만일 사실이라면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하여도 변명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여왕은 제피리아의 가신들에게도 조사를 붙여라, 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적절치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회의실에 없는 자이더라도 분명히 본인의 귀에 들어갈 것이었다. 후에 따로 여왕직속의 부대를 불러 은밀히 조사 시켜야겠다며 생각을 정리하고는, 숨을 짧게 내쉬어 긴장된 공기를 풀었다.
“후우, 아무튼……. 아멜리아 왕녀의 부고를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이야 짐작도 못했군. 필리오넬 전 국왕의 부고가 들려온 지 세 달도 채 되지 않았건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이겠지. 예년대로라면 조만간 남쪽 지역에서부터 장마가 시작될 것이다. 폭우가 내린다면 전투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겠지. 그것이 대처가 늦은 우리 군이 승기를 잡을 기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네. ……두 시간 후 이 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겠다. 그때까지 새로운 보고가 올라오기를 기대하겠네. 이만 물러가 보게.”
식사는커녕 수면조차 취하지 못한 채로 열 시간이 넘도록 지속되던 회의가 간신히 휴식을 맞게 되었다. 열 시간이라면 어마어마하게 들릴 테지만 충격과 혼란 속에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기 때문인지, 회의의 대부분은 필요 없는 분쟁만이 벌어졌을 뿐이었다. 문관들은 비전의 사용불가 상황에서 미리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고, 선전포고를 들은 직후로도 발 빠른 대응을 하지 못해 이만큼의 피해를 입게 한 무관들을 질책했다. 반면 무관들은 허술한 외교를 펼치며 전쟁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문관들을 비난해댔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보다도 서로를 탓하기만 바쁜, 온갖 꼬투리를 잡는 싸움 속에서 마지막에나마 무언가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정도였다.
모두들 오랜 긴장에 지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지금까지 계속 고민하는 얼굴로 입을 닫고 있던 남자 하나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세 달, 세 달이라……. 혹시 필리오넬 전 국왕의 부고가 들려온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하는 분, 계십니까?”
아직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푸른 머리의 남자였다. 지금껏 긴장되다 못해 가라앉아 버렸던 회의실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낭랑했다. 얼굴은 마흔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이 앳되었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그의 높은 지위를 연상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여왕이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듯한 표정의 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응했다. 그에 모두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음…… 보자, 두 달은 지난 듯 하군, 아우레우스 공.”
“정확히 칠십이일 전입니다, 아우레우스 장군.”
외교부의 문관이 덧붙였다. 아우레우스라 불린 사내는 생각에 잠기듯 고개를 끄덕였다.
“칠십일 정도라면……, 흐음.”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는가? 말해보게.”
여왕은 비록 폐회를 지시한 후였지만 답이 내려지지 않는 상황에 몹시 답답했는지, 아우레우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로채듯 그를 재촉했다. 아우레우스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에, 제 짐작이 맞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조금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세일룬 전역에서 모은 군대가 제피리아와의 국경지대로 이동하는 데에는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아, 이것은 그저 계산상의 수치일 뿐이에요. 현실적으로는 상당한 대군, 게다가 원정군인 만큼 한 달 보름조차도 상당히 빠듯할 것이리라 생각되는군요. 국왕이 서거하고 그의 왕녀가 바로 뒤를 이었다고 해도 전쟁의 준비에 고작 십, 이십 일이라니……. 통상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시간이 아닙니까? 국가간의 전쟁, 그것도 원정이라면 그렇게 빨리 준비될 수는 없을 텐데요.”
아우레우스가 동그란 눈을 굴리며 주위의 반응을 살폈다. 회의실 내의 모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자도 있었다. 늙은 대신 한 명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그건 처음 회의를 시작할 때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말이 아니오? 전쟁의 준비가 빨랐다는 것은 그 만큼 세일룬의 분노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무기와 군량을 비롯한 여러 제반준비들을 채 마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겠소? 실제로 비전을 통해 올라온 정보에서는 병참 부대의 도착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하지 않았소. 게다가 적국의 전쟁 준비기간이 짧은 것 따위는 당장 논할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늙은 대신의 얼굴은 ‘겨우 쉴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를 다시 불러들이더니, 한다는 게 고작 이런 말이냐!’라고 말하는 듯 불만과 피로로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그냥 넘길 수도 있었던 아우레우스의 말에 더 비판적으로 반응하였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우레우스 장군. 이전에 이 건이 언급되었을 때에도 말씀드렸지만 세일룬은 지금 이상할 정도로 조급한 움직임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장기전의 시작이 아니라 마치 배수진을 치고 마지막 총공격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화살 등의 소모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고 보고를 받지 않았습니까? 부상자를 치료해 병력으로 환원시키기보다는 그들을 밟고 전진하며, 최우선 보호 대상일 마도사 부대조차 최전선에서 공격을 강행했다 하고요. 퇴로나 보급로 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은 것 또한 이상합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모습들이 통상의 경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토록 조급한 그들이 전쟁의 준비 따위를 길게 했겠습니까?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되는 대로 집어 들고 내달려왔겠지요. 오죽했으면 곡괭이나 삽을 들고 있는 병사가 그리 많다고 하겠습니까?”
중년의 장군이 늙은 대신의 말을 잇기라도 하듯 발언했다. 이에 아우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잘 보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통솔되지 않은 진열, 곡괭이와 삽을 든 병사들……. 이런 보고를 듣고 그들이 정규병이 아닌 일반 백성으로 이루어진 의용군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용군은 병력 측면에서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잖습니까. 우리가 지금껏 의용군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회의를 진행시켰던 것은 비록 세일룬 병사들의 무기에 농기구 따위가 많이 섞여있었지만 그들의 전력이 제피리아에 결코 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에. 전투의 결과를 보면 그러하긴 합니다. 실제로 비록 기습이었다고 해도 우리 제피리아의 국경수비대가 무너진 것은 적군의 상당한 기량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조금 전 다나 장군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세일룬은 ‘이상할 정도로 급했다’라고 말입니다. 수비대가 정말로 전력 면에서 밀린 것인지, 아니면 총공격을 하듯 달려드는 그들의 기세에 밀린 것인지는 조사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 보입니다. 또한 수적 열세를 감안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기습공격을 가한 다수의 병력이 기세 또한 월등하다면,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이 떨어진다 해도 전투는 그들의 승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서,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오, 아우레우스 군?”
늙은 대신은 아우레우스의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장군’이라는 호칭마저도 생략하고 ‘군’의 호칭을 붙였다. 둘은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 늙은 대신의 노골적인 태도에도 회의실의 모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우레우스가 기분이 상한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짧게 대답했다.
“일반 백성으로 이루어진 의용군의 모집과 통솔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세일룬은 보통의 전쟁보다도 빠른 속도로 전쟁준비를 끝마쳤습니다. 그 때문에 더욱, 의용군이 실제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이 자리에서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의한 것임을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아우레우스가 잠시 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화에서처럼 왕녀의 암살자에 대한 진위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요. 그런데 모두들 중요한 한 가지의 가능성을 빼놓고 이야기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뜸을 들이는 듯한 느린 진행을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가 재촉했다. 이에 아우레우스가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중단된 말을 이었다.
“의용군이 포함되어 있든 아니든, 이토록 빠른 전쟁 준비는 분명히 말해 이상한 것입니다. 분노로 인한 것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세일룬은 빠른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해 왔었다, 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의용군이 존재하는 것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부분이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급조된 의용군이 아니라 아직 장비가 마련되지 않은 신규 병사라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더군다나 그들이 사용한 무기에는 곡괭이와 삽뿐만 아니라 철구와 같은 다소 특이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이것들은 정규병이 아닌 용병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즉, 세일룬이 용병을 이용해 병력을 배가시켰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용병 모집 또한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작업이므로 제 생각을 뒷받침해줄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세일룬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오? 가능성이 있군, 그래. 필시 암살자를 보낸 것도 그 상대국일 테지. 암살자를 보낸 자를 찾는 수고를 덜겠어. 폐하, 어서 세일룬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하는 것은 잠시 미뤄주시지요!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끼어든 것은 아우레우스와 반목하던 늙은 대신이었다. 아우레우스가 결론을 내기 전 가로채어 의견을 제시하며 공을 세우려던 대신은, 다시금 아우레우스에게 말을 잘리는 통에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지금 아우레우스에게는 여왕이 준 발언권이 있는 터라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우레우스가 기분이 좋은 듯 생글 웃었다.
“계속하시오, 아우레우스 장군.”
“감사합니다, 폐하. ……다른 나라도 아닌, 오랜 세월을 평화주의로 무장한 중립국가인 세일룬입니다. 누군가 싸움을 걸어온 것이 아닌 한, 먼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리라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최근 반년 이내에 세일룬과 타국간의 분쟁이 발생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외교부가 채 알아내지 못한 다른 나라와의 마찰이 존재했을 수도 있고, 국왕의 부재 상태에서 정책이 바뀌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게다가 전쟁 준비가 아니더라도 단순히 군사력 증강을 위해 병사를 모았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마침 왕녀가 암살당하였고, 평소보다 증가되어 있던 병사들이 복수를 하려 몰려든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우레우스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상상과 추측에 기초한 것이었기에 이러한 반박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우레우스는 전혀 기죽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박을 수긍하며 좀 더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그의 입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어 이러한 대담을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예, 옳은 지적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병사를 모았는데 왕녀가 살해당했다’라. 만일 사실이라면 정말 멋진 우연이군요. 아, 물론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이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세일룬은 피해자이지만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보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암살자는 국력을 증강시키는 과정에 있는 세일룬을 건드리는 상당히 무모한 짓을 한 것이고요.
그렇다면 이번엔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과연……. 그런 것일 수도 있겠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 것은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여왕이었다.
“자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겠네, 아우레우스 장군.”
여왕이 동조의 뜻을 내비치자 아우레우스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반대로 여왕은 조금 전보다도 다소 어두워진 얼굴이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낮게 깔린 여왕의 말에 회의실은 다시금 긴장으로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었다.
“날짜를 정확히 셈해보도록 하지. 우선은 왕녀 암살에 관해서이다. 필리오넬 전 국왕의 부고 이후로 아멜리아 왕녀의 죽음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하였으니 그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문단이 준비를 거쳐 세일룬에 당도하는 데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터인데, 조문단은 분명 무사히 돌아오지 않았나?”
여왕이 확인을 위해 조문단의 한 명으로 다녀왔던 중년의 문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하며 여왕의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희 조문단이 세일룬에 도착한 것은 필리오넬 전 국왕의 부고를 듣고 10일가량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또한 세일룬에서 삼일 간 기거한 후 세일룬을 떠나올 때까지 아무런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첫 방문일 이외에는 아멜리아 왕녀를 직접 뵙지는 못하였으나 조문단으로서의 충분한 예우를 받았으며 왕녀 전하의 이름으로 내려온 답례품까지 받아왔습니다. 조문단 방문 중 사건이 발생하였고 당시에는 우리 제피리아를 주범으로 지목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렇다 해도 하루 이틀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하겠군. 조문단이 세일룬에서 출발한 직후에 일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최대 육십여 일 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원정군이 세일룬 전역에서 모여 이곳까지 오기에는 적어도 한 달에서 한 달 반 이상이 걸릴 터. 그렇다면 전쟁의 준비에 불과 십 여 일, 넉넉잡아도 삼십 여 일만이 소요되었다는 것인데……. 고작해야 이 기간 동안 군대도 아닌 의용군이 편성되어 전력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이는군. 아무리 왕녀 암살로 인한 국민들의 분노가 컸다고 해도 말이네.”
한탄하듯 자책하듯, 그렇게 여왕의 말이 이어졌다. 한탄은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 제피리아에 대한 것이며, 자책은 세일룬의 선전포고 서간 도착 이후 반나절이 지나도록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모두가 여왕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나 여왕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고, 단어를 고르는 듯 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이 말을 내뱉는다면 모든 상황이 180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여왕이 아니었다. 추리의 시작을 끊었던 아우레우스가 여왕의 말을 이어받듯 서둘러 말했다.
“그렇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누군가가 준비해왔던 것이 아닌 한…….”
아우레우스의 말에 여왕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중요하고 또 중요한 발언인 만큼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했고, 혹시라도 있을 다른 가능성을 다시 고려해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내뱉어져버린 것에 더 이상의 시간을 끄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회의실 내는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여왕이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후우,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라는 것을 모두 염두에 두게.
세일룬 내에서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군비 증강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이네. 그리고 왕녀 암살이 발생하자 준비되어 있던 군대를 이용하여 전쟁을 시작하였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으나 그리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군. 이로써 대부분의 의문이 설명 가능하게 되었으니 말이야.
다나 장군의 의견처럼 그저 군비 증강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우연히 왕녀가 암살되어 전쟁이 발발했다, 라는 것이 가장 희망적인 관측일 것이다. 혹은 군비증강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태가 발생하여 급히 달려왔다면, 그것도 좋겠지. 그러나 혹여라도 군이 어떠한 목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면……. 우리가 맞이한 이 전쟁에는 단순한 원한이나 이익 문제가 아닌, 더 큰 무언가가 개입한 것일 지도 모른다. 자국의 왕녀의 목숨마저도 이용해야 할 무언가를.”
전쟁까지 일으킨 이상 왕녀의 죽음이 거짓일 리는 없으리라.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세일룬은 자신들의 왕녀를 죽음으로 몰아가면서까지 무언가를 커다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일이 무엇인지까지 알 수는 없지만 제피리아는 이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로 말려들어 버렸고, 가해자가 아닌 완연한 피해자인 셈이었다.
술렁이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여왕은 조용히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을 뒤엎어버린 이 엄청난 가능성 이외에도 다른 것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회의실 내부의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 벌컥,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린 회의실의 문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폐……, 폐하!”
회의실로 뛰어든 것은 조금 전 여왕의 명에 따라 비전룸으로 달려갔을 데오폴트 장군이었다. 데오폴트의 옷매무새는 이전과 달리 상당히 흐트러져있었다. 그리고 긴 거리를 뛰어오기라도 한 듯 매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여왕은 아쉬운 듯 생각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호들갑인가?”
“아룁니다, 전선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세일룬의 장군 중 한 명을 생포하여 심문하였다 하는데……, 그, 그것이……!”
막상 뛰어들기는 하였으나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듯, 데오폴트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곧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다음의 말을 쏟아내었다.
“아멜리아 왕녀를 암살한 자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그는……, 그는, 분명히 ‘리나 인버스’라 말했다고 합니다!!”
모두가 굳어져버린 가운데 데오폴트의 외침이 회의실 안에 메아리쳤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리고 데오폴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도 간단했다. 그러나 모두는 자신의 머리에게 생각하기를 멈추라 명령하였다. 그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단 하나의 진실이었으므로.
오랜 침묵을 깨고 여왕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어라고? 리나 인버스?!”
데오폴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긴장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더 떨린 상태여서 목소리가 잦아들었지만, 고요해진 회의실에서 그 목소리는 충분히 크게 울려 퍼졌다.
“예, 폐하. 그 자가 또한 말하기를, 리나 인버스는 제피리아 왕국의 명령으로 왕녀를 암살한 것이라고……, 그리하여 세일룬이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충격이 회의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동요는 없었다. 회의실 안의 모두가 보이지 않는 공포에 휩싸이기라도 한 듯 침을 삼킨 채 아주 작은 호흡의 파도만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잠시 후 탄식으로 화했고, 탄식 끝에 흘러나온 여왕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쥐어짜내지는 듯 했다.
리나 인버스.
당대 마도사 중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그녀의 이름은 마도에 무지한 자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한 것이었다.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그녀의 이름은 여기저기에서 숱하게도 거론되었으니까. 그러나 리나 인버스는 그저 제피리아를 출신지로 가졌을 뿐, 단 한번도 제피리아라는 국가와 얽힌 적이 없는 한낱 개인에 불과하며 지금은 국내에 거주조차 하지 않는 여행자의 신분이었다.
그 순간 회의실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에는 리나 인버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그들 모두는 오래 전부터 리나 인버스와 이름이 매우 닮은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제피리아 왕국의 명령’이란 키워드에 해당하는 것은 아마도 리나 인버스가 아닌, 바로 그녀.
“……루나를……, 인버스 경을 데려오라. 어서!”
진실은 이제껏 머리를 굴려왔던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렸다. 실제로 제피리아로 인해 왕녀 암살은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엄청난 분노가 군대를 움직였다는, 믿고 싶지 않았던 가능성 하나가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연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에르메키아니 카이젤이니 국경이 어쨌다느니,
……모르셔도 됩니다.
혹시 궁금하시면 아래 지도를 참고하세요~
(세일룬과 제피리아는 아주 수줍게 손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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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슬레이어즈 팬사이트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06.07.03 1차 리뉴얼, 동 사이트 공개
2012.02.04 2차 리뉴얼,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
2012.02.12 린젤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