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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O V E L/저주받은 나라

저주받은 나라 1부 - 02

by waitress 2012. 9. 18.

1부、 암살

 

 

 

2
제피리아의 수도, 제피르 시티. 도시 중앙의 대로변에서 약간 벗어난 골목에 식당이 하나 있었다. 음식 맛에 대한 평판이 좋은 곳인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식당 안은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웨이트리스 한 명이 촘촘히 놓여진 테이블의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식당의 문이 벌컥,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밖은 때 아닌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 열린 문 사이로 식당의 소란을 짓누를 정도의 엄청난 빗소리가 밀려들어왔다.
“어서오세요!”
동시에 차분하지만 낭랑히 울리는 웨이트리스의 인사가 손님을 맞아들였다, 비록 그들이 군복을 입고 손에는 방패와 창을 들고 있는 병사일지라도. 열린 문 너머로 십여 명 가량의 병사가 마찬가지의 군장을 한 채 열을 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폭우 속을 뚫고 온 병사들의 모습은 식당에 어울리지 않게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두 명의 병사는 문을 닫거나 식당 안쪽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는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웨이트리스는 눈을 가늘게 하고 잠시 그들을 살펴보고는, 이내 생글 웃는 표정을 지었다. 웨이트리스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두 병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쪽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손님?”
병사들은 대답 대신 자기들끼리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런 후에 앞에 있던 병사 하나가 식당 안으로 한 걸음 성큼 들어가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식당 구석구석을 훑었다. 한참 후에야 다시 입구로 나온 병사가 웨이트리스에게 늦은 대답을 했다.
“아니, 식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인버스 경이 맞으시지요? 당신을 왕성으로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저희와 동행해주십시오.”
병사는 비록 앳된 얼굴이었지만 군인다운 적당한 위압감을 풍기며 명령을 전달했다. 양 손에는 창과 방패, 그리고 그의 뒤로 늘어선 십여 명의 부대원. 짙은 비구름 탓에 어둑어둑해진 거리는 그들의 위엄을 살리는 데 한 몫 했다. 소란을 눈치챈 식당의 손님들도 긴장을 삼키며 웨이트리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을 무시한 채 웨이트리스는 한 순간의 거리낌 없이 답했다.
“그러긴 좀 곤란한데요. 전 ‘인버스 경’이 아니거든요.”
그녀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일하는 것을 방해받아서였기 때문이다―라고, 병사는 생각했다. 그녀의 딱 부러질 정도의 반응에 병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시 식당 안을 둘러보았지만 그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희는 제피르 시티 아렌거리의 ‘실버엑스’에서 일하고 있을 인버스 경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식당에 다른 종업원이 있습니까? 당신 외에는 보이질 않는군요.”
“이 식당의 웨이트리스는 분명 저 하나뿐이기는 하지만, 전 그런 이름이 아닙니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식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손님들께 방해가 됩니다.”
병사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모여 있던 부대원들에게로 돌아갔다. 식당을 잘못 찾은 것이 아닌지 토의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웨이트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부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다급히 달려오며 그녀를 막았다.
“잘못 찾아온 것이라면 미안합니다. 바쁘신데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떠나겠습니다. 이 아렌거리에 ‘실버엑스’의 이름을 가진 다른 식당이 있습니까?”
“맛있는 요리로 유명한 '실버엑스'라면 아렌거리, 아니 제피르 시티 전체를 통틀어 이 곳 하나 뿐이죠.”
“그럼 당신의 성이 ‘인버스’가 맞습니까?”
“성은 맞아요. 그러나 당신들이 찾는 ‘인버스 경’은 아닌데요.”
“이보시오, 성이 맞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건 또 뭐란 말이오?”
"다른 '인버스 경'이 어디에 있나 보지요, 뭐."
웨이트리스가 응수하자 병사들이 불안한 얼굴로 수런거렸다.
“제게 볼 일이 없다면 이만 들어갈게요. 식당 일이 바빠서요.”
“뭐야, 가족인 건가? 어이, 인버스 경의 성함이 어찌 되시냐?”
“예? 부대장 님, 그걸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상부로부터 명령을 하달 받으신 것은 부대장 님이시잖아요.”
“크으, 그렇지…. 이것 참 난감하구만. 장군 님께서는 ‘인버스 경’이라고만 하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거라 하셨다던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구먼. 이봐, 너. 얼른 성에 가서―,”
“장군……?”
무표정하던 웨이트리스가 ‘장군’이란 단어에 반응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잠시, 그녀는 쿡 하고 웃더니 금새 장난기 깃든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걸어가 부대장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다소 거친 발걸음에 부대장이 당황해하였지만 웨이트리스는 개의치 않고 부대장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작은 키의 여자가 올려다보는 것임에도 그 눈빛이 날카로워, 부대장은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뒷걸음질쳤다.
“왜, 왜 그러시오?”
“그렇지, 이 옷은 그의 부대였어. ……흐응, 수염이 멋진 부대장 님, 몰라봐서 미안해요.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인걸. 군에 입대한 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부대장이라니 대단한데요? 아니면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니, 지방이나 국경에서 공을 쌓고 올라왔을까?”
“뭐라고……?”
“이곳엔 아우레우스가 보낸 거냐?”
“아니, 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 아니, 아셨습니까……?”
부대장이 말을 더듬었다. 상대는 종업원도 한 명에 불과한, 작디작은 식당의 웨이트리스일 뿐이다. 평소라면 군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그녀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느 새 말이 짧아진 그녀를 앞두고 부대장은 호통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십여 명은 될 병사들의 무리에 겁을 먹기는커녕 자신의 군 경력을 맞추고, 게다가 ‘높으신 분’의 이름을 호칭조차 없이 부르는 여자. 부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아우레우스의 부하이자 자신의 직속 상사인 자로부터 들은 명령은 ‘퇴역 여기사’를 데리고 오란 것이었다. 퇴역이라 해도 전직 기사의 신분인데 웨이트리스를 하고 있다는 말에 의문이 들긴 했지만,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 판단 따위는 중요치 않았기에 생각은 진즉 접은 지 오래였다. 식당에서 스물다섯 남짓 해 보이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엔 운 좋게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가 나가떨어진 몰락귀족가문의 철부지쯤으로 보았다. 식당 일도 그러한 경제적 이유에서 하고 있는 것일 테고. 그리 생각하니 앞뒤가 대충 맞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거지로 봐서 ‘몰락귀족가문 출신의 퇴역한 전 말단 기사’라는 추측은 틀린 것만 같았다. 부대장은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정이 어찌되든 명령은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여자를 강압적인 수단을 쓰더라도 왕성으로 끌고 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셔가야 하는 분인 것인가? 그렇지만 아무리 보아도 서른은 넘지 않았는데, 운 좋게 기사의 작위는 받았도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자리에 오르기엔 이른 나이가 아닌가? 그렇지만 장군 님의 성함을 이렇게나 불러대는 사람, 아니 분이라니.
이런 부대장의 고민을 눈치챘는지 웨이트리스가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녀석들을 보내다니. 내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아우레우스 녀석도 많이 둔해졌나 보군.”
“분명 저희는 아우레우스 장군님의 명령으로 온 것입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 아무튼. 당신은 인버스 경이 맞으신 거지요?”
“아, 자세한 건 알 것 없어. 내 성은 인버스가 맞긴 하지만,”
그녀는 말하며 흘낏, 식당의 안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단 한 명뿐인 웨이트리스의 부재로 식당 내부는 상당히 소란스러워져있었다. 빈 그릇이 하나 둘 쌓여있는 테이블이 여럿 눈에 들어왔고, 한참 전에 다 만들어졌을 요리를 전달받지 못해 불만을 터뜨리는 손님도 있었다. 주문을 하려 웨이트리스를 계속해서 불러대고 있는 손님도 두어 테이블.
그녀가 그 소란 속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며 쏘아붙였다.
“내가 기사단장을 그만둔 것은 벌써 3년이나 지난 일이야. 그런 거창한 호칭 따위, 이제 내게는 없는 것이라고. 식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그만 돌아가.”
“기사단……장……?”
그녀는 얼이 빠진 병사들을 무시한 채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으며 소란스런 식당의 한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그만 돌아가’라는 말은 병사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처음 나온 ‘기사단장’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잠시 후 닫힌 문이 벌컥 열렸다.
“당신이 전 기사단장이라구요?!”
“그런 말은! 저희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정말입니까?”
“아, 아무튼 이대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인버스 경, 아우레우스 장군님의 명령입니다. 함께 가 주십시오!”
문간에서 병사들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웨이트리스는 얼이 빠진 그들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거 참……,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하는 거야? 난 이제 기사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게다가 내가 누군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녀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지 않겠어? 잘못 찾아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옆 거리의 식당에 또 다른 인버스 경이 있을 지 말이야.”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인버스 경!”
“게다가~ 보다시피 지금은 아르바이트 중이라서. 미안하지만 자리를 뜰 수가 없겠어.”
병사들이 난처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설득을 시작하려 하였지만 웨이트리스는 입을 다문 채 접시를 날랐다. 북적거리는 식당 안에서 바쁜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며 병사들은 망연해졌다. 이대로라면 임무는 실패한다. 얼마 후 날아올 상관의 질책에 모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퇴역 군인이라 해도 전 기사단장이란 ‘높으신 분’에게 강압적인 수단을 쓰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그 전에 그녀에게 자신들의 무력이 먹힐 지부터가 문제였다.
잠시 후 주방 안쪽에서 중년의 아주머니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날도 궂은데 우물쭈물하는 병사 여럿이 가게의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이 루나 양, 높은 분의 명령이라는데 잠깐쯤 다녀와도…….”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쨍그랑!’
아주머니의 옆으로 하얀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벽에 부딪혀 산산이 바스러졌다. 귀를 울리는 소리가 가라앉기도 전 웨이트리스가 과장된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손이 미끄러졌네요. 사장님 괜찮으세요? 다치진 않으셨고요? 거기 유리조각 조심하세요, 제가 곧 치울게요. 안 그래도 손님이 많은데 일거리가 또 늘어버렸네. 이렇게 바빠서야 성이 아니라 바로 옆집이라도 가지 못하겠어요, 후후후후후후.”
한층 높아진 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식당을 울렸다. 생글 웃음 짓는 웨이트리스의 손이 이상한 각도로 주방을 향해 뻗어있었지만, 그녀는 천사같은 웃음만을 남기며 손을 제 자리로 돌렸다. 그런 웨이트리스를 바라보며 아주머니 역시 빙그레 미소지었다.
“핑계대지 마, 루나 양. 갑갑한 예복을 입기가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그리고 이 접시 값은 아르바이트 비에서 제하겠어.”
“윽, 역시 예리하시군요.”
“왕성에 가지 않을 거면 얼른 음식이나 나르지 그래? 그리고 저쪽 테이블에 나이프가 빠졌더구나.”
웃음과 함께 소리 없이 날아온 나이프는 어느덧 웨이트리스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나이프는 잠시 후 안쪽 테이블의 손님 앞에 놓아졌다. 접시와 나이프가 날아다니는 소란 속에서 모든 손님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를 계속 했다. 그들에게는 사장과 웨이트리스의 툭닥거리는 풍경이 익숙했고, 더 나아가 이를 보기 위해 식당을 찾는 손님도 있을 정도였다. 어린 손님들은 이 광경을 반짝거리는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인버스 경……?”
병사들은 이 정신없는 상황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누군가 흘린 중얼거림을 들은 웨이트리스가 잠시 분주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것 참, 끈질기시네. 상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건 자~알 알지만, 난 이제 왕성에 가기 싫거든. 그래, 좋아. 그러면 나를 왜 데리고 가려 하는지 그 이유나 들어보자고. 설마 기사단장 직을 다시 맡으라거나 하는 것 따위는 아니겠지?”
“……이유는……, 모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일개 병졸입니다. 그저 당신을 데려오라는 명령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부대장이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이었으며 군에 몸을 담았던 만큼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야기. 이 룰을 감히 자신에게까지 적용하다니! 웨이트리스가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
“이름도 모른다, 이유도 모른다? 흥, 가서 아우레우스에게 전해라. 나에게 볼일이 있다면 직접 행차하시라고 말이야. 나 루나 인버스, 비록 이제는 지위도 권력도 없지만. 명분도 없이 이리저리 움직일 사람은 아니야.”
말을 끝낸 그녀는 끝내 사람들의 속으로 발길을 돌렸고, 병사들은 다시는 그녀를 불러낼 수 없었다.

 

 

 

 


루나는 어디까지나 철저히 베일에 싸여진 캐릭터이죠. 슬레이어즈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모두가 각자의 루나 인버스를 그리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캐릭터가 정해진 리나 들과는 달라서인지 오히려 루나라는 캐릭터를 만들기가 수월했어요. 덕분에 제 마음대로 말도 안 되는 요상한(?) 설정들을 집어넣었답니다(웃음).

이전에는 쉬피드 나이트로서 마냥 쿨하고 강하고 멋지기만 한 루나 인버스, 그것만을 상상해왔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녀는 쉬피드 나이트이기 이전에 사람이더군요(게다가 리나의 언니).

상상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예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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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슬레이어즈 팬사이트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06.08.16 1차 리뉴얼, 동 사이트 게재
2012.02.05 2차 리뉴얼,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

2012.02.12 린젤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