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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O V E L/저주받은 나라

저주받은 나라 1부 - 03

by waitress 2012. 9. 18.

1부、 암살

 

 

 

밤이 더욱 깊어지고 술잔을 기울이던 손님들도 하나 둘 집을 향했다. 웨이트리스가 남아있는 몇 명의 손님에게 폐점을 알리려던 무렵 닫혀져 있던 식당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열린 문 앞에는 흰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자라 회색에 가까운 머리색을 한 여인이 홀로 서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오다니! 고된 일과의 피로가 쌓인 루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막 들어온 손님에게 폐점을 고했다. 그러나 루나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는 눈을 부릅뜨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런, 이 식당의 웨이트리스는 서비스가 영 아닌 걸. 손님을 이런 식으로 맞이해도 되는 건가, 루나?”
“……맙소사, 아시리아 씨?!”
열린 문 앞에는 호위 한 명 대동하지 않은 제피리아의 여왕, 아시리아 젠느 제피리아가 있었다. 여왕은 평소에 즐겨 입던 붉은 주단의 망토도 금실이 수놓아진 실크 드레스도 아닌 수수한 디자인의 미색의 드레스만을 입고 있었다. 고운 회색으로 물든 긴 머리를 틀어 올린 머리장식은 분명 고가의 것일 테지만 그조차도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큰 거리에 사는 중소 귀족 가문의 귀부인 정도일까, 도무지 한 나라의 여왕으로 보기는 어려울 외양이었다. 그러나 겉모습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아시리아는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가게를 슥 둘러보고는 창가의 빈 자리로 걸어갔다.
“아시…… 아니, 폐하……! 이 늦은 시간에 호위 한 명 없이 이런 곳엘 오시다니요? 아니, 그보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설마 아까의 그 일, 때문인가요?”
루나가 습관적으로 메뉴판을 들어 한 손에 끼고는 쭈뼛쭈뼛 아시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자리에 앉으려 하는 손님에게 선뜻 메뉴판을 내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달조차 뜨지 않은 이런 늦은 시간에, 그것도 ‘이런 날에’. 여왕이 홀로 거리에 나왔다니, 도저히 식사를 하러 온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굳은 표정의 루나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부드러운 얼굴로 살짝 윙크했다.
“‘그 일’이라니 무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단지 우연히 산책을 하다 허기를 느껴 근처의 식당에 들어왔는데, 그 가게의 웨이트리스가 우연히도 옛 친구인 것……, 그 뿐이다. 그런 딱딱한 호칭은 피해주면 좋겠네.”
아시리아가 웨이트리스의 팔에 끼어있는 메뉴판을 빼어들며 장난스레 그것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식사를 하러 왔다’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고 하는 그런 뻔한 행동에 루나는 긴장이 풀린 듯 작은 숨을 내쉬었다.
“옛 친구라……. 정말 그 뿐이라면 좋겠습니다만 말입니다, 폐하. 이 늦은 밤에 우연찮게 왕성 밖을 산책나오신 겁니까?”
“그렇다고 하지 않았나. 인버스 경, 지금 그대는 여왕인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후후, 이 루나 인버스, 폐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저 역시 딱딱한 호칭은 사양이라고요, 아시리아 씨. 이름으로 불러주시겠어요? 인버스 경이라니, 지금의 전 기사도 그 무엇도 아닌데 어쩐지 남사스럽네요.”
루나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아시리아의 맞은편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겼다. 나무로 이루어진 의자와 바닥이 적당히 거칠게 긁히는 소리를 울렸다. 루나는 소리 나지 않게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메뉴판을 한 쪽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말을 이으려 하다가 아시리아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슬며시 입을 닫았다.
“지금의 난? 역시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는 것이냐.”
대신 말을 이어받은 아시리아에게선 조금 전의 장난스런 느낌이 사라져 있었다. 농담인 듯한 말을 주고받다가도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다니. 3년만의 만남이었지만 루나에게 있어 아시리아는 변한 것이 없어보였다. 루나는 그러한 모습에서 왠지 모를 옛 기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려 했지만, 그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떠올라버려 웃음을 곧 지워버렸다. 왕성이란 어차피 그러한 곳. 이런저런 기억은 남아있지만 추억이라 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웃음의 끝에서 쓴 맛이 났다.
“아아. 전 역시 그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만 한 왕성이란 곳이 싫거든요. 아시리아 씨가 가끔 그립긴 하지만.”
“하하, 가끔이라니 아쉬운걸. 그렇다면 왕성을 거추장스럽지 않고 편하게 만들어준다면 돌아와 줄 텐가?”
아시리아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 눈만은 여전히 루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집요함이 묻어나올 것 같은 반응에 루나가 질린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거 참……. 정말 예전과 달라진 게 없으시군요. 우연찮게 만난 옛 친구에게 이렇게까지 복직을 강요하다니 너무하십니다, 아시리아 씨?”
“우연찮게 만났으니 한 번 말이라도 건네 보아야지. 그대가 나를 만나주려 하지 않는데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말하겠나.”
“풉, 그러면 고작 복직 이야기를 하려고 저를 성으로 부르려 했다고요?”
루나의 장난스런 질문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잠시 멈추어졌고 아시리아는 잠시나마 떠올렸던 미소를 지웠다. 루나를 성으로 부르려 한 이유, 그것을 생각하는 아시리아의 표정은 점차 굳어져갔다. 마침 아시리아의 오른쪽에는 창이 있어서 그녀는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적당히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그조차도 충분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창 밖에 펼쳐진 것은 분노로 달려온 세일룬조차도 창칼을 거두어야 할 만큼의 폭우, 그리고 짙은 어둠 뿐이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방향을 가늠할 수는 있었다. 아시리아가 시선을 준 저 곳에는 아마도 제피르 시티를 둘러싼 높은 산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저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겠지. 이렇게 비가 와서야 봉화는 피울 수도 없지 않나. 전선의 상황은 어찌 되었지? 파발은 언제 도착하는 것인가? 비전을 통해 내린 명령들은 제대로 전해졌을까? 아직 장마가 시작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니, 국경지대는 어쩌면 비가 개었을 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밤이 되기 전 전투가 한 두 차례 더 있었을 지도. 그 결과는 어찌 되었나? 방어선은? 구원 부대는?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에 아시리아는 스스로도 놀라며, 털어내듯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어차피 손발이 묶인 상황이다. 전선은 군대에 맡기고, 자신은 중앙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런 것이었다면 정말 좋겠구먼.”
“그러게 말이에요.”
대수롭지 않게, 별 것도 아닌 듯이. 툭 던지듯 내뱉어진 아시리아의 말을 루나는 그보다도 더 가볍게 받아넘겼다. 우연한 방문이란 뻔한 거짓말을 믿어줄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못한 스스로에게 투덜대면서. 그런 루나의 반응이 의외였던지 아시리아는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렸고, 반면 루나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겁니까?”
이대로 아시리아와 툭탁거리는 것도 싫지는 않았지만 슬슬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루나는 생각했다. 여왕인 아시리아의 시간을 이 이상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그럴싸해 보일까? 그렇지만 실은 가게를 닫아야 할 시간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남아있던 손님들은 여왕의 등장과 함께 모두 빠져나갔지만 뒷정리 등의 업무가 잔뜩 남아있었다. 즉 시간이 지체될수록 퇴근이 늦어진다는 소리. 그런 루나의 속사정도 모른 채 아시리아는 여전히 말을 돌리며 여유를 부렸다.
“내가 무엇을 말할지 짐작 가는 게 있나?”
주제를 바꾸려는 듯 아시리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시리아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뜸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뜻이었다. 루나가 흘낏 주방 쪽을 쳐다보았다.
‘일이 좀 밀리긴 했지만……, 무려 여왕 폐하가 가게를 찾으신 것이니까. 오늘만큼은 사장님도 봐주시겠지?’
주방 근처에 서 있던 식당의 사장이자 주방장인 아주머니의 표정이 어쩐지 일그러진 듯 보였다. 아주머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더니 결국 조용히 주방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물소리. 귀찮은 일거리인 설거지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면 이대로 계속 이야기해도 오케이! 다시 고개를 돌리는 루나의 얼굴엔 생기가 넘쳤다.
“글쎄요~. ‘호위조차도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라면 가벼운 주제는 아닐 테고. 병사들이 저를 데리러 왔던 것과 같은 이야기인가요?”
“흠……, 글쎄.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나?”
루나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냥, 감이에요.”
“그런가. 너무 긴장할 건 없어, 처음에도 말했듯 별 것은 아니라네. 그저 그대와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온 것 뿐이야.”
아시리아가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루나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였다. 처음에는 우연을 가장하고 그 다음에는 마음에도 없는 복직 이야기를 꺼내더니, 이번에는 별 것이 아니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벼운 이야기인 척 말을 돌리는 것은 꺼내고 싶지 않은 화제를 다루어야 할 때의 아시리아의 나쁜 버릇. 즉, 이 뒤에 이어질 것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을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 기사단장인 그대에게 물어볼 것이 있네. 실은 지금 제피리아에 문제가 조금 생겼어.”
“전쟁― 말인가요.”
“……알고 있었나?”
아시리아가 되물었다. 그러나 루나의 말이 끝난 이후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다. 게다가 되묻는 아시리아의 눈엔 놀라움만이 아닌, 알 수 없는 피곤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루나의 눈과 귀를 통해 보이고 들렸지만 머릿속까지 들어오지는 못한 채 주변을 맴돌기만 하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전쟁이 시작된 것도 물론. 갑작스럽게 기습까지 당했던 모양이더군요, 이 제피리아가. 너무나도 쉽게 당해버려 어이가 없을 정도였어요.
루나는 혀끝까지 차올라온 말들을 내뱉으려다 간신히 억눌렀다. 기사단장과의 대화를 원한다면 기사단장으로서 말해줄 수 있었다. 원한다면 조금 전 ‘감’이라고 말했던 그 모든 근거들을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알기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하였다. 루나는 나는 웨이트리스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대었다.
“그런데 이 전쟁과 ‘전 기사단장’이 무슨 관계라도 있나요?”
아시리아는 대답 대신 눈을 들어 루나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회의실에서 신하들을 대하듯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푸른빛이 섞인 회색의 눈동자가 그에 비친 것의 내면을 걸러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 집요하게 눈앞의 존재를 응시했다. 그런 아시리아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루나는 모르는 척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대신들이 그러했듯, 자신 역시 그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왕의 시선이 무겁더라도 당당히 마주보아야만 했다.
“……관계가 있을 수도 아닐 수도. 실은 그대는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지.”
“호오, 제가요?”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맞받아쳤다. 아시리아는 다시 한 번 루나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눈을 반짝거렸다면 꾸며낸 표정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루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얼굴을 하였기에 오히려 거짓은 없어 보였다.
설령 이것마저 거짓이라면……? 아니, 그렇지 않을 거다.
아시리아는 문득 떠오르려는 의심을 버리려 노력했다.
“……난 물론 그대를 믿네. 비록 지금은 한낱 식당 종업원의 모습이지만, 내가 철모르던 어린 왕녀였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를 계속 도와주었던 그대가 아닌가.”
아시리아는 깊은 신뢰를 담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루나의 눈과 눈동자, 그리고 그 너머의 깊숙한 곳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능한 한 마음이 전해지도록. 루나를 만난 이후로 했던 모든 말들 가운데 이 말만이 진실이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루나를 성으로 불러들인 후 이야기를 했다면 루나는 다른 대신들로부터 ‘왕녀 암살의 용의자’ 취급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루나가 소환을 거부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시리아는 내심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루나의 재 소환을 막을 것을 전 부서에 엄히 명하였다.
루나는 자신이 ‘용의자’라는 것을 몰라야 했다. 암살사건도, 용의자로 루나와 리나가 지목된 것도,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전쟁의 존재조차도. 이것이 루나를 향한 믿음이 성립되는 절대적인 조건. 그러나 루나가 전쟁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이곳이 수도라고는 할지라도 아직 어떠한 발표조차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의 말은 진심이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것이냐, 루나……?’
믿는다,
그렇기에 시험해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나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말을 마친 순간, 루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루나의 변화에 따라 아시리아 역시 얼굴이 굳어져갔다.


 

 

 


폐, 폐하.

저 잠시 화장실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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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슬레이어즈 팬사이트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07.01.16 1차 리뉴얼, 동 사이트 공개
2012.02.07 2차 리뉴얼,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

2012.02.12 린젤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