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가시나무 숲
루나가 안내받은 내빈실은 응접실과 그 안으로 이어진 침실로 구성된 작은 집과 같은 구조였다. 침실에는 새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침구가 정갈히 놓여 있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당장이라도 몸을 누이고 싶은 유혹이 솟구쳤지만, 루나는 기사단 근무 시절 내빈을 호위 혹은 방문하러 자주 찾았던 이곳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루나가 침대 시트를 두어 번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흰색의 절제미가 있던 침실과 대조적으로, 응접실에는 고급스런 가구들이 이 공간을 찾은 이를 편히 대접하겠다는 듯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특히 한 가운데에 위치한 응접세트의 의자와 테이블은 그 세공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든 것이 루나의 집,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식당의 것들과 너무도 차이가 나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고작 메달 하나를 가슴에 달았을 뿐인데 주위의 환경은 이렇게나 변해버린 것이다.
루나가 빈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천장까지 닿아있는 길다란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늘 보아온 것과 같은 익숙한 색을 띠고 있었다. 또한 아름다웠지만 작았고, 혼자 바라보기엔 너무나도 높았다. 루나는 한참 동안 창문을 응시하다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 하나를 불러 무언가를 준비하게 했다. 병사는 비록 감시의 대상이지만 ‘내빈’으로 이 방에 모셔와진 자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빈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인버스 경.”
“오! 오셨습니까.”
처음 내빈실을 찾은 이는 카일이었다. 급히 걸음을 옮긴 것인지 어깨를 덮은 갈색 머리칼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내빈실의 입구에서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고개를 들어올린 카일은 벌어지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궁정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 온 만큼 그로서는 내심 루나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루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반갑게 자신을 맞이한 것이다.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는 티 세트와 색색의 과자가 펼쳐져 있었으며 루나는 그 앞에서 그야말로 ‘내빈’으로 온 것처럼 태평하게 다과를 즐기는 중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찾아올 이들을 위해 조금 전 루나가 병사에게 준비를 부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을 알 수 없는 카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루나가 권하는 의자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왕성에는 왜 오셨습니까, 인버스 경?”
“이런, 너무하시네요. 몇 년 만에 기사단에 복귀한 부하에게 따뜻한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으시는 겁니까?”
빙글 웃음 짓는 루나의 모습에 카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부 인사나 나누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혹 기사단장 님의 허가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복귀한 것에 심기가 상하셨다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후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관, 인버스 경의 무죄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한 그런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일을 사주하실 분이 아니란 것 또한 믿고요. 하지만…… 무죄가 증명되지 않은 한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국 이렇게…….”
망토 아래에 가려진 카일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대체 왜…… 오신 겁니까.”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 배어 있다. 루나가 웃음을 지우고는 습관처럼 가슴의 은빛 메달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양각의 은빛 용은 메달을 처음 받았을 때보다 닳아버린 것만 같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폐하의 명에 따라 입성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은빛 용의 메달이 있고 폐하께서 저를 버리시지 않는 한, 폐하는 저의 방패가 되어주실 겁니다. 대책도 없이 이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은 아니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대책이라고요? 대단한 증거라도 들고 오신 건가 싶었는데, 설마 폐하가 그 대책이십니까?”
“……우선은 앉으시지요, 할 이야기가 많으실 것 같은데요.”
“아뇨, 됐습니다! 인버스 경……, 아무리 보아도 이건 자살 행위라고요. 평소와는 상황이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폐하라 해도 모든 것을 막아주실 수는 없단 말입니다. 대체 어떠한 명이기에 이 위험을 감수하셔야 하는 겁니까?”
카일이 무너지려는 몸을 테이블을 짚어 간신히 지탱했다. 루나가 고개를 들어 한탄하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믿었던 상관이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이 그에게 더없는 고통이었는지 그의 얼굴은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잠시 후 루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보이지 않지만 저 너머 어딘가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사람들은 서로 겨누던 창칼에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흐르는 피가 이미 강을 이루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는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위험이라. 글쎄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게 없기는 한데요.”
“그게 무슨…….”
“혈혈단신 적국에 뛰어들어 첩보활동을 했던 것과 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유일한 소지품인 세 개의 발톱은 제피리아에서만 통용되는 허울 좋은 신분증이니, 혹여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기사가 긴장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인버스 경, 설마……?”
“네? 튀어야죠. 얼른.”
루나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그에 카일은 놀란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제피리아 왕궁이라는 적국에 침입하신 겁니까?”
“음, 적국이라는 표현은 좀…….”
“한 가지는 틀리셨네요. 세 개의 발톱은 신분증이라기보단 노동 계약서에 가깝죠. 아니지, 발톱이니까…… 그래, 폐하의 땅을 일구는 쇠스랑이라고 하면 딱 좋겠네요.”
“쇠스랑이요?”
“네. 그것도 빌어먹을 정도로 바위와 마른 초목이 가득한 거친 곳만 골라서 말입니다.”
루나는 잠시 긴장했지만 곧 어이없어하며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카일도 루나와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나 기사의 얼굴은 그가 내뱉은 말과는 달리, 잠시나마 되찾은 웃음을 버린 채 점차 굳어지고 있었다.
“‘세 번째 발톱’을 사용하시는 건 안 됩니까?”
“아직은 일러요. 폐하께서 쇠스랑을 던져주셨으니 황무지에 찍어보기라도 해야지요.”
카일이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무지……, 그렇다면 이건 말라비틀어진 최악의 황무지로군요. ……저는 말입니다, 인버스 경.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타이밍 좋게 고장이 나 버린 비전도 모자라, 말도 안 되는 기습! 그래요, 어떻게 수만 명의 군대가 움직였는데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수가 있는 거죠?”
“조사 중이니 곧 밝혀지겠지요.”
“글쎄요, 그 이전에 전쟁의 이유랍시고 다들 떠들어대는 말조차 받아들일 수 없으니 그 조사 결과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폐하께도 보고 드리지 않았지만 몇몇 영주에게서 어마어마한 금전이 거래된 정황이 발견되었어요. 이건 아무리 봐도 내통자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쉿! 목소리를 낮춰요.”
루나가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빈실은 내빈의 안전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외부에서의 침입 혹은 도청이 비교적 어렵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나뿐인 출입구는 상당히 멀다. 창문이 제법 가까우나 외벽에는 발을 디딜 만한 홈이 전혀 없다. 마법으로 날아와 창문 밖으로 접근할 지도 모르지만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라고는 카일과 문 밖의 감시병 둘 뿐이었다. 루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말했다.
“서투르시네요. 내통자가 정말 있다면 기사단장 님은 조만간 무대에서 퇴장하시게 될 겁니다.”
“실례.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폐하께서 이런 의문들을 모르실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폐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인버스 경에게 명을 내리셨다니, 저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진정 당신을 지키려 하신다면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실 폐하가 아닌 것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네 압니다, 알아요. 그 폐하의 명령이란 진실을 밝힌다, 그리고 경의 결백을 증명한다, 뭐 그런 것이겠죠?”
“어찌 그런 경망스런 말을.”
“이 상황에 경망스러울 게 무어 있습니까? 폐하의 명, 듣기엔 좋지만 그건 지금 상황에서 경이 직접 움직이실 일이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금 희생양을 찾고 있어요. ……피를 원한단 말입니다!”
‘쾅!’
찻잔이 갑작스런 충격으로 달그락거렸다. 카일은 자신의 두 손을 테이블이 아닌 루나의 어깨에 얹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어이없는 상황에 몸을 내던진 그녀를 탓하고 싶었다, 또한 그러한 행동으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그녀를 나무라고 싶었다.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당신이 왜 여기에 계신지, 제게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갈라진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루나는 카일을 바라보지 못했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카일의 얼굴 너머 허공을 맴돌았다.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깨문 아랫입술 안쪽의 살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길고도 짧은 침묵이 지나간 후 흔들리던 찻잔이 어느덧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직은 보고드릴 단계가 아닙니다. 기사단장 님이라 해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인버스 경!!”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카일 기사단장 님. 저도 제가 곤경에 처한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더더욱 왕성을 찾은 것이고요.”
“잘 아신다고 하시면서 대체―!”
“기사단장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고 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요.”
루나가 카일의 말을 가로채고는 다시 손을 내밀어 의자를 가리켰다. 담담히, 그러나 조용히 억압해오는 말투에 카일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루나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사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휴, 기대를 하고 찾은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인가요. 하긴 당신이 이러시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입장이…….”
루나가 곤란한 얼굴을 하자 카일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화가 많이 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멋으로 몇 년이나 고집 센…… 실례, 심지 굳은 인버스 경의 부관을 해온 것이 아니니, 답을 주시지도 않을 것에 대해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들은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기사단장 님.”
“하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이니 제~발 편히 말씀하십시오, 인버스 경. 제가 당신을 불러오던 호칭으로 저를 지칭하시니 민망해서 손발이 다 오그라들 지경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현 은빛 용 기사단장이 아니십니까, 저는 일개 임시기사이구요. 이제 부관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이든 편하실 대로.”
카일이 점차 긴장을 풀며 한껏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루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당연하죠.”
“정말로 괜찮겠어, 헤츨링?”
망설임 없는 호칭에 카일의 몸이 크게 기우뚱했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간신히 버티고 앉은 카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그건 제가 새끼 거북이마냥 버벅거리던 시절에 부르시던 별명이잖아요……! 인버스 경! 저도 이제 체면이 있습니다!”
“후후 장난이야. 카일 경 정도면 될까? 사석이니 서로 편히 말하도록 하지. 카일 경도 편하게 대해줘.”
금세 빙글 웃음을 짓는 루나의 얼굴에서는 바로 직전까지 응접실을 메웠던 긴장을 한 오라기도 찾아볼 없었다. 카일이 혀를 내둘렀다. 짓궂은 장난에 화라도 내보고 싶었지만 분명 지는 것은 자신일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여전하시네요. 좋아요, 부탁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죄송하지만 그것을 들어드릴 지의 여부는 그 내용을 들어보고 난 후 결정할 겁니다.”
“좋을 대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제게 도움을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 카일 경은 폐하의 곁을 지켜야지. 기사단원을 네다섯 명 정도 빌려줄 수 있을까?”
“여왕 폐하의 명에 관련된 것입니까?”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명령의 내용은?”
“그건 말해줄 수 없어. 그만큼 비밀리에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 더 이상은 묻지 말아줘.”
“기사단장으로서 명령을 한다고 해도 말입니까?”
루나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응접실 안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지 그의 걸음은 몇 바퀴째 이어졌지만 루나는 그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카일이 굳은 표정을 풀고 다시 루나의 앞에 앉았다.
“좋습니다, 궁금한 것이 많지만 은빛 용으로써 움직인다고 하신 이상 인버스 경을 믿도록 하지요. 폐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 기사단의 존재의 이유이니까요. 기사들은 원하시는 대로 데려가십시오.”
“고마워! 될성부른 헤츨링은 역시 다르다니까.”
“인버스 경!”
∽
새로이 편제된 은빛 용 기사단과 기사들의 근황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카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쪼록……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인버스 경.”
“걱정 마. 그냥 조금 거친 텃밭 하나를 일구는 것뿐이니까.”
마지막까지 싱긋 웃음을 짓는 루나를 보며 카일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사실 루나는 전 상관이었을 뿐 지금은 부하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임시직에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 여인에 불과했지만, 아무래도 둘 사이의 관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카일이 내빈실을 빠져나간 후 루나가 어질러진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시켜둔 찻잔은 아직 두 개가 남아있었다.
“그 망할 녀석은 언제 오려나.”
루나가 중얼거리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찻물을 새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망할 녀석이란 혹시 짐을 말하는 것이냐?”
익숙한 목소리에 루나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열린 문을 통해 아시리아가 응접실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폐, 폐하?! 그게 아닙니다!”
“또 그런 재미없는 호칭으로 부르기인가?”
호들갑을 떠는 루나를 무시하며 아시리아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리고는 익숙한 내빈실을 둘러보다가 응접실의 한쪽에 놓인 소파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부르시지 않고요.”
“감시병을 달고 있는 주제에 말이 많군, 루나.”
“윽…….”
“두 번이나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아서 말이야. 난 그저 동생의 소식을 듣게 되거든 성으로 찾아오라 말한 것뿐인데 그것을 이리도 크게 부풀리다니. 그래, 다음번엔 또 무엇이라고 말할 셈이었나?”
“부풀리기는요, 저는 명하신 대로 왕성을 찾았을 뿐입니다.”
루나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의 명이었다고?”
“네. 결국 그 모든 것은 이 전쟁의 배후를 밝히고 더불어 위기에 처한 제피리아를 구하라는 의미이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가게에 직접 찾아오시기까지 하며 제게 은빛 용의 메달을 주고 가신 것은 아시리아 씨가 아니었나요? 지금은 힘도 권위도 없는 일개 웨이트리스 나부랭이인데 이런 데에라도 써 먹어야지요.”
루나가 양 손을 휘저으며 혀에 기름을 두른 것 같이 능수능란한 말을 줄줄 읊어댔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아시리아는 조금 전의 카일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긴장이 극에 달한 왕성 안에서 루나의 말과 행동은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지난 며칠간 굳어진 감정이 갑작스런 자극에 풀어져, 아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려는 아래턱을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써야만했다.
말을 마친 후 루나가 테이블과 의자를 소파 가까이로 끌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테이블에 다과 셋트를 펼치기 시작하자 아시리아가 골치가 아픈 얼굴로 한쪽 머리를 짚었다.
“차라리 궁정에서 했던 ‘우연히 왕성에 들렀다’는 말을 믿고 싶구먼. ……잘도 날 곤란하게 만들었어, 루나. 그대가 나간 뒤에 아세트 경의 추궁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는가? 그나마 카일 경이 말려주어 살았다네.”
“후후, 카일 경이요? 제가 역시 부관 하나는 잘 키웠네요.”
“그런 것 같아. 어찌되었든 당장은 죄인의 가족이란 낙인이 찍혀있으니 기사단의 특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제해주게나. ‘세 개의 발톱’에 불만이 있는 자들도 많아.”
“……그렇군요. 주의하겠습니다.”
루나가 장난기를 지우고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시리아가 대화를 잇는 대신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천장에는 샹들리에의 크리스탈 조각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내뱉은 말에는 책임을 지겠지?”
대답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루나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여왕은 시선을 옮기는 대신 집요하게 크리스탈만을 응시했다.
“이 전쟁의 배후를 밝혀내고 제피리아를 구할 것을 정식으로 명한다, 은빛 용의 기사 루나 인버스여.”
“……명 받들겠습니다. 여왕 폐하.”
잠시의 머뭇거림 후 루나가 무릎을 굽혔다. 아시리아가 목을 좌우로 움직여 스트레칭을 했다. 기분 좋은 통증이 등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보고는 언제쯤 가능하겠나, 루나?”
“죄송합니다만 궁정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현재로서는 말씀드릴 것이 없어요. 조금 더 알아본 후에 정식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하게. 단, 전쟁이 시작되고 이미 일주일이 되었어. 너무 늦어지는 것은 피하고 싶군. 그리고 루나 그대의 행적을 알아보기 위해 조사원들이 이미 파견되었다는 것을 말해두겠어.”
“원하신다면. 아, 식당의 사장님은 너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조사원들이 다칠 수 있으니 주의하라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그도 그렇겠는데.”
아시리아가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푹신한 쿠션은 아늑했지만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며칠 째 격무에 시달린 터라 목과 어깨가 제법 뻐근했다. 루나가 이를 보고 일어서더니 아시리아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피곤이 쌓인 여왕의 어깨는 제법 단단했다.
“고맙다. 그런데 루나, 설마 ‘보고할 것이 없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입성한 건가?”
“그럴 리가요? 후후. 발톱을 주셨지만 그 발톱을 움직일 방법이 없어 수족을 얻고자 입성했지요.”
“그렇군. 카일 경이라면 그대에게 힘을 빌려주겠지. ……그리고 바라던 대로 칼끝을 그대에게 돌려 동생을 보호할 수도 있을 테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루나의 손이 일순 느려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무리 아세트 경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네이지만 그렇게까지 싸움을 거는 일은 없었으니까. 보기 좋게 걸려들었더군.”
“아세트 님은 여전히 격정적이시더군요.”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을 게야. 지명수배는 5일 전에 이미 내려졌고 각국의 마도사 협회에도 리나 인버스에 대한 정보 제공을 요청했네. 아세트 경이 아니더라도 슬슬 움직이는 자들이 있을 거다.”
“예, 그래도 5일이라면 마도사 협회에 도착한 공문이 협회의 마도사들에게 채 전달되지도 못했겠지요. 리나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다면 폐하라 해도 군사를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단 며칠이라도 제피리아 왕국 수준에서의 추격은 늦출 수 있겠지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왕이 정면을 응시했다. 눈앞에 갑자기 거울이라도 나타나 등 뒤의 기사를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며칠 동안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무엇이기는요, 명을 수행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동생을 구하는 길이니까요.”
루나가 다시 한 번 머뭇거렸다. 그에 아시리아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루나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또한 루나 역시 찌푸린 여왕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아시리아가 마뜩찮다는 듯이 흥, 콧바람을 내쉬었다.
“좋아, 속아주지. 나도 이만큼 이용당해주었으면 충분하겠지? 입성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카일 경이잖나.”
“여기까지 행차하시게 해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아시리아의 어깨를 주무르던 루나의 손이 다시 한 번 느려졌다. 아시리아가 지친 표정으로 웃으며 루나의 손을 잡아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딱딱하게 부르지 말래도. 나도 덕분에 잠깐이나마 쉬고 좋았어. 그리고 루나 자네 손이 제법 맵구먼.”
“그런가요? 저희 식당의 사장님 어깨도 제법 굳어있거든요.”
“하하, 부러운 사람이군.”
그 말을 끝으로 아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나가 뒤따라 일어선 후 방을 나서려는 아시리아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아시리아가 문턱을 넘어서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루나,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편히 말씀하세요, 아시리아 씨.”
아시리아가 루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복도에서 자신을 맞이하려 관리와 병사 여럿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거리를 의식하며 아시리아가 빠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재 그대의 입장 상 수족은 움직일 수 있어도 몸통은 이 성에 박혀있어야 한다. 이것은 나로서도 어찌해 줄 수가 없는 것이야.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아시리아가 복도로 발을 내딛었다. 루나는 문턱의 안쪽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잠시 후 병사 두 명이 자신에게로 다가왔고, 루나는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멀어져가는 아시리아의 발걸음에 이어 몇 번의 철컥거리는 잠금쇠 소리가 들려왔다. 지루한 감금생활의 시작이었다.
...라고 합니다.
자 이제부터는 루나를 둘러싼, 본격 지위와 성별을 넘나드는(야) 삼각관계 궁중 로맨스가 시작될 리가 없잖...읍읍
.
.
.
2014.03.22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14.03.22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