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 O V E L/저주받은 나라

저주받은 나라 3부 - 01

by waitress 2012. 12. 26.

3부、 가시나무 숲

 

“파이어 볼!”


밤의 적막을 깨치고 산의 한 쪽 자락에 폭음이 피어올랐다. 이런 저런 비명과 칼부림의 소란을 무시한 채로 리나는 주문 한 방을 더 날렸다.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리나.”


리나와 가우리가 있는 곳은 세일룬 변경의 성채도시였다. 랄티그 왕국과 가장 가까운 세일룬령인 만큼 경비가 삼엄해야 마땅했지만 어째서인지 경비병이 눈에 띄지 않았고, 그 덕분에 인근 지역에서는 도적들이 활개를 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도적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의 구석에는 커다란 산이 하나. 리나에게 있어 그들의 산채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더불어 가우리가 난리를 피우고 있는 리나를 찾는 것 역시 쉬운 일이었지만.


“기분은 알겠지만……. 리나?”


가우리는 리나를 한 번 더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리나는 ‘도적털이’를 들켜버린 것에 민망해하며 가우리를 돌아보았을텐데 오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가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도적들에게도, 어떠한 말이나 행동을 하기보다는 주문을 외울 뿐이었다.


네 번째의 주문이 날아들었다. 토사가 머리 위로 튀어오르며 바위와 나무들이 뒤집어졌다. 도적들은 들고 있던 무기마저 버린 채로 꽁지가 빠질 세라 달음질쳤다.


“시끄러, 가우리. 기분이나 풀러 온 것이 아냐. 우린 지금 여행자금이 없잖아?”


“그러면 일을 찾으면 되잖아. 오늘도 식당에 있을 때 의뢰가 들어왔었어.”


리나가 대답대신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대지 위로 번개를 내리꽂았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바위 하나가 둘로 갈라져 양 옆으로 쓰러졌다. 불이 붙은 나뭇가지만이 타닥거리는 적막 속에서 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일할 기분이 아니라고.”


“기분 때문에 이러는 것 맞구만.”


가우리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 몇 그루로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동굴의 입구 하나가 보였다. 아마도 저기가 오늘의 희생자들의 산채일 것이다.


“리나, 불 좀 꺼봐.”


“불은 왜?”


“불을 꺼야 동굴 안으로 들어갈 것 아냐? 아직 불이 켜진 술집이 하나 있더라. 얼른 챙기고 야식이나 먹으러 가자.”


“…….”


“먹고 기운내. 그리고 후딱 떠나 버리자고, ……세일룬을 말이야.”


가우리가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였지만 리나의 귀가 그 중얼거림을, 그것도 ‘세일룬’이라는 단어를 놓칠 리가 없었다. 리나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자신의 두 뺨을 때려 기합을 넣고는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불이 꺼졌고, 바람의 마법으로 동굴 안의 연기까지 날려보낸 후 리나와 가우리가 동굴의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식량 창고와 무기고 등을 지나 가장 안쪽의 굴까지 들어가자 보물창고로 보이는 공간이 나왔다. 제법 규모가 있는 도적단이었건만 가지고 있는 재물은 너무도 적었다. 리나가 입맛을 다셨다.


“에게~ 이게 다야?”


“뭐, 네 마법에 반격 한 번 못하고 줄행랑 친 쪼잔한 도적들이니까.”


“그런가? 그 녀석들, 근성이 없기는 했지, 헤헤. 웃차~ 어디보자. 은촛대 이런 것은 너무 걸리적거리고. 은화 열댓 개랑 싸구려 루비 목걸이가 전부인가? 금화도 다섯 개 있네.”


리나가 투덜거리며 자루에 보물들을 집어넣었다.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평소에 비하면 벌이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거 너무 가난한 녀석들인데? 책도 엄청 오래된 것이고……, 앗, 부서졌다!”


“조심해, 가우리. 이런 데에 굴러다니는 책이라면 값나가는 마법서라거나, 뭐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구.”


“응, 그런데 마법서는 아닌 것 같아. 소설책인가?”


가우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책을 열었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곧 흥미를 잃은 듯 책을 구석으로 밀어두었고, 은식기와 낡은 사슬 따위가 쌓여있는 곳에서 값나갈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리나가 물건들을 모두 챙긴 후 묵직한 자루를 어깨에 매며 동굴 안을 훑어보았다. 남은 것은 쓰잘떼기 없는 금속류, 그리고 낡은 책이 한 권. 너무 낡아 겉표지가 절반 가까이 바스러진 고서였다. 겉표지에 그려진 문양을 발견한 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우리! 잠깐만, 그 책 이리 줘봐!”


“응? 이거, 왜? 별 내용 없더라.”


가우리가 중얼거리며 책을 집어서 리나에게 던져주었다. 리나는 책이 부서지면 어쩔 거냐며 한 바탕 소리를 지르고는 툴툴거리며 책의 첫 장을 열었다. 책은 종이 한 가득 알 수 없는 문양들로 가득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고대의 마법 기호라는 것 뿐. 몇 페이지를 넘기니 문양들과 함께 중간중간 짤막한 글들이 있었다. 다행히 문장들은 현대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리나의 손이 점차 빨라졌다.


“합성수…… 제작 방법……?”


“응?”


“이, 이거 클레어바이블의 사본……이잖아!!”


철컹, 갑작스런 쇳소리가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리나가 어깨에 매고 있던 보물자루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리나는 자루를 무시한 채, 혹시나 자신이 잘못 본 것이겠지 싶어 책을 다시 뒤적거려 보았다. 그러나 멀쩡히 쓰여있는 글을 잘못 읽었을 리 없었다.


“야, 가우리! 너 이걸 대체 뭐라고 봤길래 저 구석에 던져놓은 거야?”


“그야 소설책이나 관광 안내서인가 했지.”


“으그그……! 대체 어딜 어떻게 봐야 그렇게 볼 수 있는 건데?! 이거야말로 제르가디스가 평생을 찾아다닌 그거라구!”


“그런가? 미안, 미안. 그림들만 많길래 별 내용 없는 것인 줄 알았어. 찾았으니 다행이지 뭐, 하하하.”


리나가 다시 한 번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 제르가디스에게 클레어바이블의 문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전에 만난 것이니 다행일 지도 몰랐다. 겸사겸사 이 사본도 전해주면 그 녀석, 엄청나게 좋아할 거다. 그렇지만…….


망설이는 리나에게 가우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리나는 가우리가 다가오거나 말거나 책에만 시선을 집중한 채 천천히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중이었다. 리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우리가 그런 리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사본을 함께 보았지만, 사본은 여전히 그에게는 알 수 없는 그림책일 뿐이었다.


“……이럴…… 수가.”


“리나? 왜, 조금 전에 책을 던져서 찢어진 데라도 있는 거야?”


가우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책을 들여다보았다. 리나는 그런 가우리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하다가 우스꽝스럽게도 정말로 책이 찢어져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현재 자신의 눈이 읽고 있는 이 한 페이지가 없다면, 희망은 없지만 절망 역시 없었을 수 있었다. 멀쩡히 남아있는 한 페이지가 유난히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말이 적혀있길래 그래, 리나?”


“……합성된 생물의 재 분해는…… 불가.”


“응? 어라, 그렇다면?”


“이게 정말 클레어바이블이 전한 지식이라면……!”


리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밀려드는 허탈감에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리나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이 책을 실수로나마 떨어뜨리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책을 쥐었다.


사본은 어디까지나 사본에 불과한 것이다. 지식을 옮기는 이가 실수로 내용을 잘못 적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지식을 덧붙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가능성은 이 사본 자체가 거짓일 가능성. 보통 때라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빌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리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반대의 경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사본이 진실이라면 리나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두 명의 친구가 연이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야 말 것이다.


잠시 후 리나가 몸을 휙 돌렸다. 가우리의 시선이 리나를 따라잡았을 때 리나는 이미 동굴의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원본을 확인해 봐야겠어. 가자, 용들의 봉우리로.”


두 번째는 없다― 리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을 세게 내디뎠다.

 

 

 

 

 

 


역시나 수정의 가능성이 있기에 클도단에만 임시 공개합니다.

더불어 조만간 1부와 2부 글들의 매우매우 자잘한 부분들을 수정할 예정입니다. 바뀐 내용을 찾아내신 분께는 선물을 드립니ㄷ.....

내용 진행과는 전혀..는 아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관계 없는 설정이니까, 신경쓰실 필요는 없을 거에요:D

.

.

.

2012.09.24 작성

2012.12.23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임시공개

2013.1.14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