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의 여행이 계속된 지도 어언 3년이 다 되어 간다. 처음 여행의 목적이 되었던 ‘빛의 검’은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로 쓸만한 마력검을 찾아내었으니 두 번째의 목적도 끝이 나 버렸다.
새로운 목적을 정하지 못한 채 결계 밖까지 이어진 걸음은, 그저 앞을 향하기만 하였다. 새로운 길, 새로운 사람. 그럼에도 때로는 무언가를 찾고 때로는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놀라기보다는 당연히 여기며 둘은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을 훑었고, 지금은 그리워진 대륙 안의 음식 맛을 찾아 옛 여행길을 다시 밟아가는 중이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인 아틀라스 시티까지, 앞으로 십 일.
“……흐응?”
마치 언젠가도 이와 같은 날짜를 헤아렸던 것 같은 기시감이 일었다. 리나는 앞을 향하던 눈을 들어 좌우를 두리번 거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그저 끝없이 펼쳐진 숲. 이 길을 특정 지을 만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 어디에나 있을법한 숲의 한 자락에 불과했다.
“왜 그래, 리나?”
“아, 아무것도 아냐.”
리나가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래, 아틀라스 시티라면 몇 번이나 다녀왔던 곳이니 이 길을 언젠가 지나갔었을 수도 있겠지.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 게 우스울 정도라고.
“그래? 아니면 됐고. 그러고 보니 여긴…….”
이번에는 가우리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리나는 자신의 마음속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 뜨끔해 하는 한편으로 가우리가 무언가를 알아냈을까 기대가 부풀어 올라 귀를 쫑긋 세웠다. 가우리는 그런 리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사이 가우리의 입가에는 그리움을 물에 풀어낸 듯한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하, 그렇구나.”
에잇,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란 말이다, 이 자식아!
리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들어 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리나를 보며 가우리가 다시 한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리나의 머리 위에 퐁 얹고는 어린아이 다루듯 슥슥 문질러본다.
“아틀라스 시티까지 애나 보아야 하다니.”
"무슨 말이야?"
가우리의 중얼거림에 리나가 습관적으로 되물었다. 여전히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기는. 가우리의 말은 보나마나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을 것이겠지만, 그의 말에 왠지 모를 아련함이 감도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기억 안나?"
"그러니까 뭐가~."
"여긴 멋진 기사님이 악당들에게 둘러싸인 공주님을 구해낸 곳이라구."
……아.
그랬었나.
리나는 튀어나오려는 감탄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 곳은 어디에나 펼쳐져 있을 법한 숲의 한 가운데.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고 이 태양조차 나무의 허락을 구하며 빛을 비추어야 하는 깊디깊은 산중이다. 어쩌면 긴 여행길 동안 이 길을 세네 번쯤은 지나왔을 지도 모르고, 혹은 이번이 처음이라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는 그러한 길목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연할 정도의 기시감이 일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나.
-하지만 가우리 따위가 이 리나 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을 리가 없어.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리나는 알 수 없는 치기가 일어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그에 가우리는 다시 한번 리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어린 아이 취급은 그만 하라니까아."
그냥 낯이 익은 길인 것뿐일 수도 있잖아. 어쩌면 우리가 함께 여행해 온 몇 년 사이, 이 길을 지나갔었던 것일 수도 있잖아.
"여기가 맞아."
그러니까 어째서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할 수 있느냐고.
리나는 그저 지기 싫은 것인지, 혹은 다른 불만이 남은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혼란에 묘하게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가우리는 다시 한번 웃음을 짓고 그대로 뒤를 돌아선 야트막한 언덕을 몇 걸음 올라갔다. 그리고는 언덕의 끝에 있던 바위 하나에 한쪽 발을 얹고 몸을 반대로 기울여 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 말이야. 양 옆은 완만한 언덕이지만 이쪽으로 난 길은 은근히 경사도 있고 시야가 트여 있는 편이야.”
“그래서?”
“그래서, 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지만. 언덕 아래에서 조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도적들을 유인하고 있는 것쯤이야 훤히 보였거든.”
“……뭐야, 그런 거였어? 짜식, 멋있는 척은 다 하더니.”
그런 것이라면 기억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이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위쪽에서 바라보고, 또 싸움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강렬한 첫 만남이었으니 가우리라도 기억할 수 있었던 걸까.
묘한 기시감도 해결하고 가우리의 확언의 정체도 알아내자 리나는 만족한 듯 기지개를 폈다. 이제 슬슬 휴식을 마치고 걸음을 옮겨볼까. 이렇게 쉬엄쉬엄 가다가는 아틀라스 시티에 10일은커녕 보름은 넘게 걸리게 생겼다.
어라. 그런데, 쫓기는 것이 아니라……
“유인하는 것이 보였다고?”
멈칫, 언덕을 내려오던 가우리의 걸음이 아주 잠시 망설여졌다.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진작 눈치 챘지만 말이야.”
그리고는 가우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터벅터벅 걸음을 잇는다. 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건 오히려 리나 쪽이었다.
“왜 그래, 리나?”
“하, 하지만…….”
-알고 있는 거야? 지금도 그 때와 다르지 않다는 걸.
리나가 뒤의 말을 차마 이을 수는 없었다. 여행의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여행’을 목적으로 삼아왔다- 라고, 리나는 늘 둘러댔다. 그렇지만 목적이 있었다는 걸, 무언가를 늘 찾아 헤맸고 누군가의 그림자를 좇았다는 것을 제아무리 가우리라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저 목적인 ‘여행’이라기에는……,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도 자주 ‘사본’의 흔적을 지나쳐 왔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말로써 그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다.
가우리 역시 리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질 못했다. 계속해서 둘의 시선이 엇나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린다. 어정쩡한 가우리의 시선이 결국 향한 곳은 아틀라스 시티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리나와 가우리가 처음으로 함께한 곳, 그리고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그 곳.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길 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가우리가 시선을 다시 리나의 두 눈으로 옮기고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 속의 고요하고 평온한 수면이 저녁놀에 물들 듯 따스한 붉은빛을 머금었다.
“뭐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넌 나와 함께 있을 거잖아.
처음 만났을 그때와 같이, 지금도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안 그래, 리나?”
원하지 않아도 다가온 녀석.
지켜주지 말라 하여도 지켜주겠다 고집을 부리는 녀석.
그리고, 바뀌어버린 목적에도 떠나지 않는 녀석.
“……응, 그러네.”
그렇기에 이전에도, 지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인 것인가 보다. 가라 하여 가고 가지 말라 하여 가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한 순간의 인연에 불과한 것일 테니.
굳어버린 다리는 어느덧 자연스레 풀려 있었다. 리나는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펴며 아틀라스 시티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자~ 그럼, 망할 놈의 제르가디스나 찾으러 가 볼까!”
“야, 리나.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뭐가 어때서? 넌 내가 뭘 하든 나랑 함께 있을 거잖아. 아직 ‘애보기’는 끝나지 않았다구~.”
[개인지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에 수록된 삽화]
2009년의 개인지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에서 "영원히"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분량 상(& 마감에 쫓겨) 글을 채 쓰지 못하고 그림 한 컷으로 대신했었는데, 이제야 글을 완성하게 되었네요. 개인지에는 "처음과 같이" / "이제와 항상 영원히"의 두 개의 글로 작성하였지만, 실제론 "처음과 같이" / "이제와 항상" / "영원히" 의 3부작(?)이랍니다^ㅁ^
(앞의 두 글은 사실상 이어지는 내용이라 3부작이라 칭하기는 뭐하지만요. 긴 영광송을 제 멋대로 3등분했을 뿐입니다♡)
후기, 라고 하자면.
아이고 유치해라... 그냥, 손발이 좍좍 오그라드네요. 특히나 마지막이……☞☜
그렇지만 유치하고 진부한 것이 또 제 맛! 이라며, 질리지도 않고 유치한 글을 써봅니다^^;;
그냥, 이 시리즈는 저의 '리나 중심 사각관계'를 집대성한 글이라고 생각해주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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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9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