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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O V E L/단편, etc

[제로스&제라스] 티타임(2004?)

by waitress 2012. 9. 19.

 

 

 

댕, 댕, 대앵-

 


오후 세시, 티타임을 알리는 시계는 무심하게도 커다란 종을 댕댕 울립니다. 아니, 오늘따라 종소리가 무심하게 들리는 것은 오늘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겠지요. 평소 같았으면 느긋하게 앞치마를 입고 찬장에서 차 잎이 든 병을 꺼내고 있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이 날은 좀 다르거든요.

 

제라스 님께선 인간세계를 무척이나 좋아하십니다. 오죽하면 제라스 님의 장군이 없는 것은 ‘강마전쟁 때에 인간세계를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힘만을 빌려주기 위해서’라는 근거가 다분한 소문마저 돌 정도이지요. 어디에선가 잔뜩 모아오시는 차(물론 심부름은 저의 몫입니다)를 찬장 가득 장식해 두고는 매일매일 색다른 맛의 차를 드시는 것이 최근 72년간의 취미이십니다.

 

게다가 욕심이 많으셔서 차뿐만이 아니라 찻잔, 차받침, 다기에 주전자까지. 차와 관련된 모든 것이라면 모두 소유하시려고 하죠. 덕분에 수왕궁의 재정상태가 말이 아니랍니다. 그래도 한 30년 후에 제라스 님의 취미가 바뀌게 되면 이 도구들을 모조리 팔아버릴 겁니다. 아마 다른 취미가 생기면 이전의 것은 기억도 하지 못하실 테니까요.


이런 것들만 좋아하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요즈음엔 쓸데없는 것에까지 재미를 들리셨다구요. 인간들의 취미 중 하나가 바로 날짜를 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해가 7번 떠오르고 지는 것을 ‘주’라고 부르는 관습이 온 대륙에 퍼져 있는 것을 보신 제라스 님께선, 두 번째 보름 이전부터 시간의 흐름을 느껴본 적 없는 이 수왕궁에까지 ‘주’라는 개념을 도입시켜 버리셨습니다.

 

하루 하루의 흐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월요일은 홍차 잎을 우려내어, 화요일은 온갖 종류의 허브, 수요일은 원두를 직접 달인 커피…… 이런 식으로 그 날 마실 차가 정해져 있거든요 - 홍차라 해도 매일 매일이 다르지만 - .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일요일인 것입니다. 제라스 님께서 모아 오신 차들을 크게 분류하고 보니, 고작 6종류밖에 되지 않는다고 징징대시는 거예요. 3일 밤낮을 고민하시다가 결국 내 놓으신 결론이란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만든 아들의 특제 차’!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인간들은 이 날을 온 대륙의 휴일로 지정했다고 하더군요. 일주일동안 보너스도 없이 짠 월급에 혹사당한 몸, 편히 쉬어보고도 싶지만…… 한시간 후면 제라스 님께서 오실 겁니다. 제라스 님은 인간세상을 좋아하시지만 “긍지 높은 마족으로서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할 수는 없다”며 티타임을 4시로 정하셨거든요. 조금 전에 3시임을 울린 시계는 인간세계에서 가져온 것으로, 종소리는 “티타임 한시간 전입니다~ 어서 준비하세요”라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으음, 이번엔 이런 배합으로 해볼까요?”

 

지난 주 인간세계에서 새로운 찻잔을 사 오며 몰래 사 들여온 시험관 세 개. 여기에 각각 에스프레소 원액, 허브 세 종류를 섞은 것과 우유를 넣었습니다. 시험관을 이리저리 기울여 차 성분의 배합을 합니다. 에스프레소는 맛과 향이 진하니까 가장 조금, 허브는 산뜻함을 위해 에스프레소의 3배 정도. 그리고 우유를 듬뿍 넣어 부드러움과 고소함을 줍니다.

 

맛은? ……전 차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맛은 보지 않아요. 적당히 씁쓸하고 산뜻한 맛, 커피의 깊은 향기, 여기에 제가 좋아하는 따뜻한 우유를 듬뿍 넣은 것이라면 아마 맛이 좋을 겁니다.

 

“이걸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그래. 벌꿀을 넣으면 더 달콤하겠죠♡”

 

벌꿀은 많이 넣으면 걸쭉해 지니까 한 스푼만. 스푼이 다 젖어있어서 사용할 수 없으니 조르륵 병을 기울여서- 아이고, 너무 많이 기울였네요. 세 스푼은 들어간 것 같은데요.

 

“이런, 너무 달아지겠어요. 그러면 엊그제 갓 들여온 얼그레이 잎을 가루내어 볼까요?

여기에 브랜디를 한 스푼 넣으면 더 맛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달칵’

 

“제로스! 4시란다-♡ 오늘은 그라우세라도 함께 왔으니까 특별히 잘 부탁한다. 실수하면…… 아니, 실수는 없겠지, 후후.”


“……고생이 많구나. 오랜만이다.”

 

공간의 문을 열고 제라스 님과 그라우세라 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물론 이미 테이블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깨끗한 옅은 하늘빛 테이블보 위로 투명한 유리 꽃병을 놓고 검은색 장미를 한 송이 꽂아놓았지요.

 

두 분께서 의자에 앉으시는 것을 확인한 후에 엊그제 구입한 찻잔을 두 개 꺼내어놓고. 찻잔과 같은 세트의 찻주전자에 조금 전까지 팔팔 끓여놓았던 차를 담아 제라스 님께로 가져갔습니다.

 

“제라스 님, 오늘 차는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조르륵.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따스한 차가 찻잔 안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제라스 님께서 찻잔을 바라보시고는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웬일로 자신만만하구나? 그래, 그렇다면.

그라우세라, 먼저 마셔봐♡ 원래 이런 건 손님에게 먼저 권하는 거라고 인간세계의 어느 나라에서 그러더구나. 더구나 우리 제로스의 야심작이라잖아?”

 

제라스 님의 시선을 받은 그라우세라 님은 조금 못마땅하신 듯 표정이 굳어지셨습니다. 본래부터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계셨지만 오늘은 미간에 주름이 한 개 더 생겼더군요.

 

차가 아직 식지 않은 모양인지 찻잔 위로 간간이 기포가 올라왔습니다. 뽀그르르 올라오는 기포를 보신 그라우세라 님의 표정은 더욱 굳어집니다. 아마 차가 너무 뜨거워 혀를 데일 까 걱정되어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그라우세라 님께서 에스프레소의 갈색 빛 위로 허브의 푸른빛이 섞인 색에 각양각색의 향이 나는 차를 한참동안 바라보시더니 마침내 작게 입을 여셨습니다.

 

“…………세라.”

 

“부, 부르셨습니까.”

 

공간 어디에선가 세라 씨가 나타나 패왕님의 부름에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세라 씨의 얼굴에는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것이 잔뜩 서려있었습니다. 흐음, 아무래도 제라스 님의 성을 지키고 있던 늑대들에게 겁을 먹었나 봅니다.

 

“제로스가 친히 끓여준 차라고 한다. 귀한 것이니 먼저 마셔보거라.”

 

“꼭…… 마셔야만 합니까……? 저보다도 그라우 님께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

 

세라 씨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어쩌면 아침을 먹은 것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의 마이너스 에너지는 언제나 맛이 있지만 과식을 하면 배가 아플 때도 있거든요. 게다가 실수로 오크나 난쟁이 족 따위의 마이너스 에너지를 받아들이기라도 했다가는 정말 속이 뒤틀린답니다.

 

세라 씨의 명령 불복종에 기분이 상하셨는지 그라우세라 님께서 얼굴을 찌푸리셨습니다.

 

“어허, 제라스 앞에서 이 무슨 추태냐!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이런. 그라우세라 님, 배가 아픈 세라 씨를 그렇게 닦달하시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장군으로서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우리 모두 힘든 상관을 두고 있군요, 세라 씨. 동정이 갑니다.

 

계속 킥킥 웃고만 계시던 제라스 님께선 오히려 한 술 거드셨습니다.

 

“괜찮다, 세라. 그렇게 죽을 것 같은 표정 지을 건 없어.

지난주엔 다르핀과 그의 신관이 왔었는데 제로스의 차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었어. 난 다만 우리 제로스의 차를 다른 녀석들에게도 맛보게 해 주고 싶은 것 뿐이니 너무 어려워말려무나. 나 혼자 마시기엔 너무 아까운 맛이거든.”

 

“하오나……!”

 

“세라! 네가 감히 내 얼굴에 먹칠을 하겠다는 거냐!”

 

아이고, 결국 그라우세라 님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안그래도 비죽비죽 날카롭던 머리카락이 잔뜩 곤두서 버리셨셨어요. 이젠 배가 아프든 어쨌든 어찌할 수가 없겠군요. 세라 씨도 잔뜩 풀이 죽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세라 씨의 입으로 조심스럽게 차가 흘러들어 갑니다. 향긋한 향기가 제가 있는 테이블 너머에까지 퍼져 오는군요. 이야아, 세라 씨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아요. 오늘 차는 특별히 이것저것을 많이 넣었거든요. 지난주에 해신관이 마신 것과는 아마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꿀꺽. 한 모금을 넘긴 세라 씨의 표정이 왠지 이상합니다. 너무나도 황홀한 맛에 주체할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으…… 으아아악!!!”


“…세라? 무슨 일이냐! 세라!”

 

저런, 저런- 대단한 반응이군요. 세라 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곧 온 몸을 떨며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아직까지도 경련이 일어나고 있군요. 얼마나 맛이 있었으면! 해신관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는데, 아무래도 저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 소질이 있나 봅니다.

 

제라스 님께서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 웃음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아 괜찮다니까~ 그라우세라,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소멸될 정도는 아니라고. 해신관도 삼일 정도가 지나니까 괜찮아 졌…………”

 

하지만, 제라스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세라 씨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쓰러져 있는 그녀의 몸이 조금씩 투명해지며 바닥이 비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라 씨, 설마 소멸해 버릴 정도로 맛있었던 겁니까? 그러면 제가 미안해지잖아요.

 

“아니, 세라, 세라?!

……이것 참. 제로스의 차가 한 층 더 발전한 모양이네. 미안해, 그라우세라. 어쩌면 세라가 소멸해 버릴지도 모르겠어.”

 

“뭣이?!”

 
“그나저나 어때? 제로스의 차. 마족에게 이 정도의 타격을 줄 정도이니 이걸 인간계에 퍼뜨린다면 분명 엄청나게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아? 이 차 한잔이면 레서 데이몬 수십 마리를 풀어놓는 것과 맞먹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걸.

아, 그래도 멸망할 정도로 갖고 노는 건 안 되, 난 인간들을 좋아하거든…… 우후훗♡“

 

“제라스 님……? 무슨 의미이신 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것도 아니다, 제로스. 넌 역시 우수한 신관이야, 이번 달만큼은 밀리지 않고 월급을 주마. 후후.”

 

제라스 님의 생각은 역시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오랜만에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내었으니까요.

 

다음 주 일요일엔 어떤 차를 준비해야 하나- 아이고, 벌써부터 걱정이 되네요.

 

 

 

 

 

 

 


하드를 뒤지다 이런 녀석이 나왔네요. 기억에 의하면 린젤에 차마 민망해서 올리지 못했던 글, 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기가 정확하지 않아요. 한글파일에는 수정일이 2006년으로 나와있는데 (이런 글을 쓰던) 시기로 추정해보면 2004년쯤이 아닐까 싶네요.

요즘은 우중충한 글만 써대지만 저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답니다?! 특히 네띠앙 슬레동에서 놀 적에는…… 지나치게 재기발랄했어서, 절대 그 시절의 닉네임 공개는 못해요. 으하하.

뭔가 과장되었다거나 문체가 지금과 달라도 그냥. 어린 시절의 치기려니 하고 너그러이 보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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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006? 작성 추정

2012.9.19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