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왕성은 발칵 뒤집어졌다. 왕녀의 명령으로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안쪽에서 웬 이방인이 둘이나 뛰어나온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전한 소식으로 인해 이번에는 세일룬 시티 전체가 들썩거리게 되었다.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왕성 안에 남아 있던 크로펠이었다. 크로펠은 당연히 리나와 가우리로 인해 무언가 소동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어떠한 결과에든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녀의 실종이란 사태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것인지 그의 얼굴은 하루 새에 몇 년은 늙은 것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뒤이어 연락을 받은 고관 몇이 집무실로 달려 들어왔고, 조사를 위해 병사들까지 들이닥친 통에 집무실 안은 금세 수십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아멜리아의 오른팔이라던 브니두는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고관들은 병사들에게 왕녀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집무실에 무단으로 침입한 셈인 리나와 가우리를 투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왕녀의 행방을 좇는 것이 더 급하지 않겠냐는 크로펠의 호통에 막혀 그들을 투옥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가우리는 복면 따위를 입지 않은 건 잘 한 일이지만, 이 상황을 기뻐해야할 지 슬퍼해야할 지 모르겠다며 신음을 흘렸다.
성 안의 모든 이는 군주에 대한 걱정을 과시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움직임은 온 왕성 안을 훑었으나 목적에 닿지 못해 결국 성 밖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군대마저 움직이는 된 이러한 상황에서 리나와 가우리가 할 만한 일은 없었다. 리나는 음식물이 쌓여있던 집무실의 안쪽 방을 한 번 더 살펴보고는 가우리와 내빈용 숙소로 돌아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갑옷을 쇼파에 벗어던지며 가우리가 말했다. 리나는 골치가 아픈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최악이야……. 가우리 네 말을 들을 때만 했어도 설마설마 했는데.”
“버려진 음식들 말이야, 적어도 5일분은 되어 보였지? 아멜리아가 입맛이 없어서 한 입만 먹고 버린 거라면 좋겠는데.”
“하아,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가우리. 그치만…… 최악의 경우, 아멜리아가 며칠이나 전부터 집무실에 없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어. 그보다 문제는,”
“응?”
리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제부터 전할 말은 당최 입 밖으로 꺼내기가 싫은 것들뿐이었으니까. 싫은 마음을 채 숨기지 못해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만약 아멜리아가 집무실에 없었다면, 집무실로 들여온 음식을 방 안까지 옮긴 후 버린 누군가가 또 있다는 거야. 그게 음식을 전해 준 사람과 동일인물인지, 아니면 집무실 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던 것인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음식을 집무실로 전해준 ‘그’는 아멜리아가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겠지.”
“그…… 시커먼 녀석인가.”
“글쎄,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보아도 우리로서야 알 수가 없는 거니까 뭐. 대체 누구인가요, 크로펠 씨?”
리나의 말에 가우리가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 샌가 크로펠이 와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크로펠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가우리의 옆에 걸터앉았다.
“음식들은 아멜리아 님께서 집무실로 들어가신 첫날의 식사부터 지금까지의 것 전부라더군.”
“전부…… 라구요?”
“아아. 아마도 손도 전혀 대지 않은 것 같다고 하네.”
“그럼, 역시……!”
리나와 가우리가 서로를 마주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크로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네들이 조금 전 말했던 내용에 대한 것인데, 아멜리아 님께 음식을 전해드린 이는 집무실의 문 앞에 있던 경비병들이네. 교대 근무를 서다보니 병사 여럿이 돌아가며 식사를 전해드렸고, 확인해본 결과 그들 모두가 아멜리아 왕녀님을 뵈었다고 하는군.”
“네에?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다네. 방 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음식을 드렸을 뿐이지만. 그 외에 아멜리아 님을 뵌 것은 결재 서류의 전달을 담당한 브니두 님 정도이네. 어젯밤 급한 일로 지방에 내려가셨다는군. 병사를 보냈으니 내일 중으론 왕성에 돌아오시겠지.”
나라의 제1 권력자가 집무실에 틀어박힌 마당에 그 오른팔이란 자가 왕성을 떠나다니. 리나는 미심쩍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여러 명이 아멜리아를 목격했다고 하니 그를 범인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긴,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범인으로 의심한 자신들도 잘못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아멜리아가 며칠 동안 실종되었다는 ‘가설’은 빗나간 것이니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남아있는 음식들이 다소 걸렸지만, 아멜리아가 제정신이라면 적어도 신체 활동이 유지될 정도의 식사는 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아멜리아의 실종 예상 시간은 저녁 식사 이후로부터 리나와 가우리의 침입 이전까지로 좁혀졌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았으니 아멜리아를 찾아내는 데에 조금은 희망이 생긴 셈. 리나는 이런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알려준 크로펠에게 슬쩍 화가 나려 했지만, 바쁜 와중에도 자신들을 찾아준 것에 고마워해야 하는 형편이니 불평 대신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것이지만, 경비병 모두가 매수당했을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가우리가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염두에 두고는 있네만……, 당장 증거를 잡기는 어렵겠지. 가우리 군은 브니두 님을 의심하고 있는 건가?”
“으음, 약간은요.”
“그렇지는 않을 걸세. 브니두 님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아멜리아 님이고, 그 분의 권력은 오로지 아멜리아 님과만 이어져 있으니까.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그 분을 내켜 하지 않는 이는 왕성 안에 꽤나 있다네.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가문도 배경도 없던 사람이 갑작스런 승진을 했으니, 그 분을 시기하는 자가 얼마나 많겠나? 브니두 님도 본인의 입지가 그리 굳건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니,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킬 만한 일은 하지 않으실 게야.”
크로펠이 덧붙였지만 리나와 가우리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권력이 목적이라면 그렇겠지만…….”
“다른 짚이는 것이라도 있는가?”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리나가 잠시 중얼거리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가우리가 대신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말할 것이 없다는 둘의 의사를 대신 표했다.
“그래. 어찌되었든 리나 군과 가우리 군 덕분에 아무도 열지 못했던 집무실의 문을 열 수가 있었어. 고맙게 생각하네.”
“서로 이용해 먹었으니 피장파장인가요? 어째 저희가 더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하하, 그런가? 조금 전 둘을 투옥시키려는 것을 막아주었으니 용서해주게나. 실은 둘이 왕성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누군가 끼어들기 전에 얼른 입성 허가를 내려준 것이라네. 요즈음은 왕성으로의 출입이 상당히 어렵거든.”
“그렇군요. 세일룬……,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크로펠이 대답대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가우리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닐세. 단지, 결국 왕성이 주인이 없는 채로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싶어서 말이네.”
말하며 크로펠은 시선을 창 쪽으로 옮겼다. 크로펠은 유독 눈가에만 집중되어 있는 주름을 한층 더 주름지게 하며, 창밖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병사들을 안타까운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네요. 이전에 필 아저씨 때에도 비슷하다면 비슷한 상황이었죠.”
“그렇군. 그렇게 평화로웠던 세일룬인데, 언제인가부터 바람 잦을 날이 없어진 것 같구먼. 필리오넬 전하께서 승하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 무슨 소란인가. 아멜리아 님께서 철이 없으신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인지. 차라리 전자라면 좋겠는데 말이네.”
“…….”
“부디 무사하시길 바랄 뿐이네. ……몇 명의 왕위계승자가 사라지고 바뀌었는지 이제는 헤아리는 것조차 피곤하구먼. 이 늙은이도 쉴 때가 된 겐가, 하하.”
크로펠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리나와 가우리는 이를 못들은 척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크로펠이 입을 닫자, 리나가 슬며시 뒤늦은 대꾸를 하며 대화를 이었다.
“왕위계승자라 함은 행방불명된 제 1왕녀……, 그레이시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나?”
“그냥요. 예전에 필 아저씨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가? 그리운 이름이로고. 그래도 그레이시아 왕녀님이 나가실 때엔 제법 괜찮은 나라였다네. 너무 평화로운 것이 지긋지긋해서 뛰쳐나가실 정도였으니까.”
크로펠은 오랜만에 들은 왕족의 이름에 그 시절을 회상하는지 부드러운 얼굴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슬픔에 침식당해 사라지고야 말았다.
“리나 군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세일룬이 잃은 왕위계승자가 그녀 하나가 아니었음을.”
“아아…….”
“지금의 세일룬 역시 그 때와 마찬가지로 세일룬 본래의 모습을 잃으려는 것일 지도 모르지. ……아니, 이미 잃어버린 것일 지도. 아멜리아, 그 귀여웠던 꼬마 아가씨도 이젠 여왕 폐하가 되었고 말이네.”
“……마을에서 세일룬이 용병을 모집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용병생활을 여러 해 해왔지만 세일룬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인데요.”
가우리가 말을 마치며 크로펠을 따라 창 밖에 시선을 주었다. 크로펠은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지만 그 뿐, 이번에도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가우리가 대답을 재촉하려는 듯이 덧붙였다.
“그 브―, 뭐라던 자도 말할 정도였으니 영주 급의 소규모 모집은 아니겠죠. 국가 차원의 모집이라면 혹…….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는 것은 이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그 브니두 녀석! 아까 아니라고는 하셨지만 실은 그 녀석이 꾸민 자작극이거나 한 건 아니에요? 도저히 왕녀의 오른팔이란 작자처럼 보이진 않았다구요.”
리나가 거들었지만 크로펠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을 미룬다기보다는 대답 자체를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보여, 리나도 더 이상은 채근하지 못한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크로펠은 결심을 굳힌 듯 표정을 굳게 다잡으며, 그러나 힘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은 상당히 고민했었네. 자네들이 입성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여기엔 대체 왜 온 건가?”
“네? 그야 아멜리아를 위로하러―,”
“그래. 그리고 그것이 막혔을 때에 왜 바로 돌아가지 않은 건가.
……자네들을 성 안으로 들이고 이용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일세. 리나 군, 가우리 군. 자네들은 이 곳 세일룬의 성문을 넘지 말았어야 했어.”
크로펠이 말끝을 흐리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리나와 가우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말을 더듬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금 전 자네들이 세일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했었지? ……그래, 잘 보았네.
많은 것이 변했지. 시간도, 시대도 변했어. 라이젤, 디루스― 변경 국가들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고 결계 밖 대륙과의 소통도 가능해진 만큼, 중립만을 고수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사실이네. 아멜리아 님은 아직 어리고 생각이 젊어. 그 분 자신이 새로운 국왕이 되는 것이지 선대의 2세가 되는 것이 아니니, 굳이 선대들과 같은 길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세.”
조금 전 능숙한 수완으로 리나들을 움직이던 크로펠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그는 자신의 감정마저 조절하지 못하는, 근심에 허덕이는 한 노인에 불과했다. 그의 표정이 목소리와 함께 점차 굳어져갔다.
“아멜리아가 변했나요?”
“……누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네. 하물며 왕위계승이라는 더없이 특수한 상황이니 더 그러하겠지. 그렇다 해도, 모든 것이 변한다한들 이 나라의 근간마저 바뀌어선 안 되는 것 아니겠나. 아무렴, 전쟁만큼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전쟁……이라고요?!”
크로펠은 과거의 회한을 되씹듯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의 수준을 넘어선 군비증강.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전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 곳은 이미 자네들이 알던 곳과는 다른 곳일세.”
크로펠은 이어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의 발언의 내용만으로도 리나와 가우리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둘의 표정을 보며 크로펠은 쓴웃음을 짓고는,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 못들은 것으로 해 주게. 난 이만 돌아가 봐야겠네. 아멜리아 님의 안위가 확인되는 대로 바로 알릴 테니 이번에야말로 방에서 기다리고 있게나.”
“네……에. 부탁드릴게요.”
가라앉은 방의 분위기에 문이 닫히는 소리는 상당히 시끄럽게 울렸다. 크로펠이 방을 나가고 한참이 지나도록 리나와 가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 말없이 벽을 바라보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느새 차가워진 공기에 리나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일어섰다. 생각해보니 조금 전 ‘암행’을 나갈 때에 창문을 열어두고는 몇 시간을 그대로 방치한 것이었다. 창가로 다가간 리나는 문을 닫으려 창문의 틀을 잡았다가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마침 등불을 들고 움직이던 병사들조차 이 근처에 없는 것인지, 창밖에는 그야말로 짙은 어둠만이 펼쳐져 있어 한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악마라도 소환되어 세일룬의 정의의 수호자를 데려가 버린 것만 같은, 그런 불길한 밤이었다.
저희 동네 밤은 너무 밝은데 말이지요...
꺼지지 않는 가로등불.
가끔씩, 정말로 짙은 밤하늘을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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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08 슬레이어즈 팬사이트 린젤(http://linzel.net) 공개
2012.04.30 리뉴얼, 슬레이어즈 팬카페 클레어바이블도굴단(http://cafe.naver.com/clearbible) 공개
2012.05.12 린젤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