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예정된 무언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쓰고 보니 여행을 엄청 많이 다녀본 사람인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남들 다 다녀왔다는 유럽여행도 내일로 기차여행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학교 졸업 이전까지는.
대학교 다닐 때에는 워낙 엄격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친구와의 여행도 다녀보질 못했다. 합창동아리의 공연이나 교환학생으로 며칠간 외국에 다녀온 것이 전부. 여행이라기도 뭐한 목적이 분명한 방문이었고 수십명이 우르르 움직이는 그런 이동이었다. 그 외엔 두 차례의 국토대장정 정도가 있지만 뭐, 이건 여행은 아니잖아?
사실 대학생 때에는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같다. 무언가에 배고파 하지도, 지쳐 쓰러질 만큼 힘들어 하지도 않았다. 적성에 잘 맞은 학과를 찾은 덕분이겠지, 게다가 취직은 100% 보장되고. 취업에 힘겨워하는 많은 분들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그럭저럭 대학생활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왔던 것 같다(물론 간호학과 사람들이 다 맘편히 취직걱정을 안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문직에 대한 것'만' 배우기 때문에, 적성이 맞지 않을 경우 전과나 편입 등을 고려해는 등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던 내가 직장에 다니며 당일치기 혹은 1박2일의 국내 여행을 두어번 다녀왔다. 혼자서 배낭 하나 짊어지고(지금 생각하면 참 겁도 없었다, 첫 여행인데). 당시의 나는 지치기도 했고, 크게 사고를 쳐 버려 심신이 울고 있기도 했다. 생명을 다루는 이 직업은 무언가 실수를 한 뒤에는 죄책감과 무거운 책임감에 미치도록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에 밤기차를 타고 훌쩍 떠난다거나, 아무도 없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은 놀라울 만큼의 치유 효과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여행의 시작이었기 때문일까, 나에게 있어 여행은 '장소'가 목적이 되지 못한다.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해도, 설령 길을 잃어도 그 길에 피어있는 들꽃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결혼 후에는 남편과 함께 국내일주 신혼여행, 뉴질랜드 캠핑카 여행, 기타 소소한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이 모든 곳에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할 때보다 오히려 길을 잃고 주변을 둘러볼 때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이번 여행도 시작되었다.
추석 일주일 후 부산 시댁에 다녀오며~ 평소와는 달리 수원을 경유하는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이유는 더 저렴하니까. 그리고 온갖 노선을 이용해보길 좋아하는 기차 매니아인 남편님의 의향에 따라. 추석 때에도 사정이 있어 내려가지 못하고 일주일 후의 주말에 다녀올 수 있었다.
이 모든 우연이 겹쳐진 덕분에 우리는 기차의 창문을 통해 샛노란 색의 금빛들판을 볼 수 있었다. 제대로 추석에 내려갔거나 평소처럼 서울 직행의 기차를 이용하는 등 어느 하나만 달라졌다면, 영영 이 들판과 인연을 맺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너무나 아름다워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실 당장 기차에서 내려버릴까 고민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확 내려버릴 것을, 부산에서 가져온 짐들 걱정으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 때에는 샛노란 색이었고 여행 당일인 4일 후의 목요일에는 개나리빛이었거든. 굳이 말하자면 14K의 파릇파릇한 금빛이 24K로 누렇게 변해버린 게다(웃음). 물론 충분히 아름다운 들판이지만 풋풋함이 사라져 버렸달까, 은근한 아쉬움이 남는다. 내년에는 며칠 앞당겨 내 생일 즈음에 꼭 보러 와야지!
AM8:50 집 출발
AM10:00 서울역에서 누리로 열차 탑승
AM10:50 오늘 도보 여행의 출발점인 평택역에서 내렸다. 목적지는 천안역에 도착해 호도과자를 사 먹는 것(!)이지만 거리를 재 보니 25~30km의 거리가 나온다. 대장정 당시 60km도 하루에 주파했던지라 걸어가는 것이야 별 문제는 없지만 시속 5km의 약간 빠른 속도로 6시간을 내리 걸어야 하는 수준. 걷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다.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 시작부터 목적지는 버렸다. 걷다가 걷다가 가까운 역으로 들어가면 되지 뭐.
평택역은 2004년 여름, 남편이 혼자서 떠난 첫 도보여행의 종착점이었다고 한다. 당시 지하철은 수원역까지만 운행되어~ 수원역에서 내린 후 집인 부산까지 무턱대고 걸어갔고, 내리 하루를 걸은 끝에 평택에 도착해 여기에서 부산행 기차에 올라탔단다.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9년이 지난 오늘, 평택에서 남편의 도보여행을 이어서 시작하게 된 셈이었다.
(사실 여기에도 우연(=나의 변덕)이 작용. 원래는 오산에서 내리자고 맘 잡고 기차에 탔다. 그러나 오산에서 천안까지 가자면 분명 중간에서 포기할 테고 그럼 천안호도과자를 먹지 못할 것 같아서 천안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평택으로 변경한 게다(웃음). 근데 이거로는 모자랐어. 결국 호도과자는 먹지 못했다.)
평택역, 도착!
일단 방향을 잡기 위해 철길 위의 다리에 올라가 보았다.
정처없는 여행이 될 테니 언제라도 힘이 들면 기차를 타고 돌아올 수 있도록 철길을 따라 걸어야 하는데, 왼쪽이 나을까 오른쪽이 나을까~? 결론은 둘 다 똑같이 예쁘더라.
놓치면 큰일나! 철길을 따라 여행한 덕에 기차나 지하철을 5분에 한 대씩 본 것 같다. 철도덕인 남편님은 그 때마다 기차를 바라볼 뿐이고~
사진이 마음에 들게 나와 트위터에도 올려보았다. 그랬더니 평택시에서 내 트윗을 리트윗해 주셨더라. 아무래도 '평택'으로 실시간 검색을 하고 계셨나보다(웃음).
길가의 코스모스가 너무 예뻐 한 컷. 길을 따라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는데 처음 보는 품종이 놀라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 암술과 수술들이 별☆ 모양!! 접사를 찍고 싶었으나 폰카로는 한계가 있어 이 사진으로 만족하련다. 형부 DSLR이라도 빌려올 것을, 아니면 상태 쥐약인 디카라도 가져올 것을~~ 이놈의 폰카로는 아름다움을 도저히 살릴 수가 없다T_T
사실 DSLR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번 여행 다녀오며 확실히 결정했다. 사자!! ……그리고 리뷰 쓰는 오늘은 이미 샀다. 으하하. 아우 다시 사진이라도 찍으러 가고 싶다. 그치만 이미 수확을 끝냈겠지;
논 사이로 걸어가기. 길에는 알 수 없는 풀이 자라있었다. 꽃 같기도 하고 이끼 같기도 하고. 그 어떤 화려한 꽃들보다도 아름답다.
이 일대의 논은 메뚜기를 이용해 해충을 잡는 것인지 메뚜기가 엄청나게 많아 걸을 때마다 벼에서 벼 사이로 뛰어다녔다. 사사삭 움직이는 소리가 귀엽게 들리더라.
간간이 작은 개울이 보였다. 농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수로일 지도.
철길을 지나오니 한적한 산책길이 펼쳐져 있었다. 억새가 아직 푸른 잎을 지니고 있었는데, 윗부분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더라. 늦가을의 누렇게 변한 억새밭만 보았던 나로서는 신선하고 또 놀라웠다. 억새는 건초마냥 누렇게 바랜 것이 아닌 은빛과 연둣빛의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오른쪽에 물줄기가 보이더라. 그리고 작은 샛길이 나 있어, 마뜩찮아 하는 남편을 끌고 샛길로 들어가 보았다. 강을 건너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강을 건널 수는 없었지만 대신에 이 곳을 만날 수 있었다.
아아…… 정말 당장이라도 DSLR을 들고 평택역으로 달려갈까ㅠㅠㅠㅠ 이 사진으로는 "대체 이게 뭐라는 거야" 싶겠다;
덧붙이자면-
우리 부부는 뉴질랜드의 자연 풍경이 좋아서 그리고 다른 여러가지가 너무 좋아서 그 곳으로의 이민을 갈까 진지하게 고려중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장벽이 너무 커서 아직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연히 들렀던 평창 눈꽃마을의 풍경이 뉴질랜드와 흡사하더라. 아마 고지대라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 탓일 것 같다. 추위에 약한 나이지만 추위는 어떻게든 이겨낼 테니 그 곳에 가서 살자고 이야기 중인데.
……여기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당장이라도 집을 짓고 살고 싶은― 완만한 구릉과 야트막한 초원, 키 작은 관목, 습지, 강과 모래톱이 어우러진 곳.
아무도 가지 않은 수풀을 걸어가보니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여기 집 한 채만 지으면 안될까요T_T
머나먼 뉴질랜드보다 추위에 벌벌 떨어야 하는 평창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따스한 우리의 이상향. 앞으로 새로운 곳을 발견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곳이 내 안의 1순위이다.
핸드폰 파노라마 기능으로 찍어본 풍경. DSLR에 파노라마 기능도 있어!! 이제 화질 좋은 파노라마 사진을 가질 수 있을 거야 여보야, 흑흑.
지도로 찾아보니 다리는 '안성천 2교'란다. 다들 찾아가 보시라~~!
샛길에서 다시 빠져나와 산책로로.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갈대밭―
……이지만 잠시 걸어가자 기분이 확 상했다. 이게 결국 한국 사람의 국민성인가 싶은, 들판 곳곳의 불법 경작물. 자기 땅도 아니면서 말뚝을 박고 끈까지 묶어 놓았더라. 왜? 누가 들어올까봐요? 들어가면 안되나요?
표지판이 곳곳에 붙어있었지만 농작물은 모두 그대로였다. 이미 9월 10일은 한 달이나 지나 있다고요!! 작업이 계획되어있든 아니든 불법 경작을 그대로 놔두는 건 또 뭡니까!! 경고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이대로는 경고를 받은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기른 농작물을 수확해 갈 것이다. 이미 거의 다 자라 있었으니까.
민법에 따르면 이런 경우 경작물이 다 자라기 전에는 땅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으며 경작물이 다 자란 후에는 (불법으로) 농사를 지은 사람에게 권리가 있다고 한다. 법부터가 이상하다. 들키지 않게 수확시기까지 경작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어쨌든 지금은 여행 중이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능한 한 밭이 있는 쪽에 시선을 두지 않으며 한참을 걸어갔다.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주위에 민가가 있나 두리번두리번~
드디어 민가가 나왔다. 너른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들이 있는 작은 마을. 사진은 새로 지은 깔끔한 주택이지만 대부분은 한국식의 낡은 민가였다. 집 사이사이에는 채소밭이 있어 역시 한국사람답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여기가 바로 농촌이기도 하고.
그리고 발견한 빈 집. 집을 허물다가 만 것인지 뒤쪽 지붕은 반쯤 무너져 있었다. 분명 사람이 살던 곳일텐데 식물들이 제 집인 양 완전히 둘러싸고 있어, 이거 사람이 들어가서 살지 못할 그런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을씨년스럽다기 보다는 원시림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사진 가운데의 길쭉한 식물은 집 안의 나무 한 그루에 담쟁이 등이 얽힌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 집 저희한테 파세요, 고쳐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
마을의 작은 식당에서 제육과 순두부로 점심을 해결. 식당 앞에는 폐타이어가 화분보다도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식사 후 다시 돌아오며,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 안성천의 모습. 좋다 좋아, 헤헤…….
이 다리를 경계로 경기도 평택시에서 충남 천안시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절반의 시간을 걸어온 셈이니 목표를 확실히 수정해, 천안 외곽의 성안읍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속도를 낼 수가 없거든.
천안에는 황금들판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평택에서 드문드문 보이던 논이 여기에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더라.
곳곳에서는 추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TV로만 보았던 벼 베는 모습을 처음 봐서 즐거웠다. 아직 수확을 시작하지 않은 논 곳곳에는 논 가장자리의 1m2 남짓한 공간마다 벼가 손으로 베어져 뉘여 있었는데, 낱알을 가져가지는 않은 채더라. 이것은 땅의 신이라거나 참새 등에게 바치는 그런 것일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한참 걷다가 신가리의 원두막에서 잠시 꿀잠. 그리고 중간중간 길바닥에 주저앉아 휴식. 난 도시에서만 자라왔지만 국토대장정도 다녀온 여자라규~ 길바닥에서도 누워서 잘 수 있어!!(웃음)
점차 짙어진 습지. 4대강 사업에 여러 의미와 목적이 걸려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아름다운 습지들이 수없이 매몰된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니, 4대강 사업을 하지 않는다 해도 강변의 이런 길을 도시에서는 죄 산책로로 다듬고 주변에 공원을 만들고 했었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것을.
햇살을 받으며 평화롭게 낚시를 하는 강태공들. 멋을 아는 분들이다. 참고로 우리 아버님은 자타공인의 낚시광이시지만 이런 잔잔한 곳은 취급도 안하신다. 오로지 바다에서, 그것도 험한 무인도의 새벽낚시를 좋아하시지(웃음).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은색으로 빛나던 억새가 구릿빛으로 물들었다.
이조차도 아름답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감상을 뒤로한 채 발길을 재촉해본다.
PM 6:00, 성환역에 도착.
용산역까지 가는 급행 지하철을 타니 기차와 별 다를 것 없는 속도가 나왔다.
오늘의 이동거리는 도보로 약 15km였다. 역시나 얼마 걷지 못했어. 그치만 수치를 따지자면 그것은 도보여행이 아니라 빨리 걷기 대회가 될 것이다. 15km에 불과한 거리였지만 그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는 성환역에서 시작해 천안역 호도과자를 먹어봐야겠다. 그리고 DSLR을 꼭 들고 와서 이 멋진 풍경들을 제대로 남겨야지.
201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