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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단 meting-pot
사진출처 : http://cocanews.com/?doc=news/read.htm&ns_id=19227
연극 <상놈>을 보고 왔다. 최근 뮤지컬은 몇 번 보았지만 연극은 참 오랜만이었는데, 대강 훑어본 스토리와 '국악, 민요가 나온다'는 사실에 혹해 대학로로 고고. 초대권을 가진 지인 덕분에 무료로 연극을 볼 수 있었다, 감사감사.
먼저 간단한 감상을 쓰자면- 좋았다. 묵직했다. 흥미로웠다. 격렬했다. 씁쓸했다. 울컥했다. 분노했다.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지금까지 리뷰라던가 감상을 남겨본 공연은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딱 두 편 뿐이었는데 오늘은 뭔가를 남기고 싶은 기분에 끄적여본다. 아마도 두서없는 기록이 될 듯. 뭐 남들 보라고 남기는 리뷰는 아니니까, 혹시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리뷰가 뭐 이딴 식이냐"라고 투덜대지 마시기를 바란다.
오늘 공연은 초연이었다. 초연은 배우들이 실수를 하거나 아직 덜 아물어진 연기를 하는 것이 많다고들 하던데, 중간에 작은 실수가 여럿 있었지만 크게 신경쓰일 만한 것은 아니었다. 딱 한 분의 연기가 아쉬웠는데, 초연이라 긴장하신 것일까? 어쨌든 초연인 덕분에 연극에 대해 검색해 보았을 때 간략한 스토리는 알 수 있었지만 그 감상평이나 스포일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첫 감상자라는 기분이 묘하게 즐겁고 흥분되기도 한다. 더욱이 마음에 깊이 새겨진 연극이었기에.
첫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순간 뮤지컬을 보러 온 것인가 착각할 정도. 한이 느껴지는 민요가락을 열창하는 한 분을 중심으로 열명 가량의 군무가 바닥을 훑으며 지나갔다. 힘이 느껴지는 동작들이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에서 '살인, 살인'의 군무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달까. 이 연극 전체를 어우르는 사람들의 편견, 괴롭힘, 고통-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잘 녹아 있었다. 뮤지컬 전문 배우들이 아니실텐데 이 정도의 군무를 준비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군무와 음악이 있어 극이 한층 더 살아난 것 같다.
오프닝 이후 첫 장면은 신부님의 기도씬. 뒤돌아선 채 불어로 뭔가 대사를 말하길래 "와, 발음 좋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정말 외국인 배우였다. 처음에는 외국인 배우라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었는데, 곧 돌아서서는 분노에 이글거리는 푸른 눈으로 관객을 노려보며 외친다. "네가 저 사람을 죽였어!!". 이 영화의 메시지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박력에 놀랐을 뿐이지만 후에 같은 씬이 나왔을 때에는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저나, 나와 눈이 딱 마주쳤을 때에는 정말이지 놀라서 움찔했다(웃음). 소극장이라 가능한 것이겠지, 이러한 교감은. 후에 유랑단이 나와서 흥겨운 가락을 노래할 때 박수를 치지 않는다고 유랑단 단원 분께 꾸지람도 받았다. 그치만 박수를 치면 노래가사가 잘 안들려서요~ 헤헤. 극의 흥을 돋우는 것이 우선일지 노래가사를 더 잘 들으며 집중해서 보는 게 우선일 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 같다.
연극은 흥겹게, 부드럽게 흘러가며 중간중간 어두운 메시지를 심어놓았다. 살짝살짝 내비치는 복선, 배우들의 은근한 표정 변화에서 "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겠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반전이라 할 만한 설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과장되지 않고 적당하게 진행되어 좋았던 것 같다. 반전을 위한 복선과 설정만큼 싫은 것도 없으니까.
스토리는, 간략하게 말하자면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괴롭힘, 시기와 조롱, 그 가족들이 받는 고통, 그리고 그 당사자가 받는 고통에 대한 것이었다. 거기에 얽힌 많은 사람들의 이권다툼과 등을 돌린 한 사람... 자세한 내용은 갓 막을 연 공연에 스포일러가 될 뿐이니 생략하겠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새겨두어야지.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셋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괴물'의 존재로 인해 붕괴되어버린 한 가족의 슬픔과 증오, 사랑이 뒤섞인 너무나 안타까운 감정.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체면과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많은 권력자들. '괴물'에게 마음을 준 듯 했지만 결국 그의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란, 허울뿐인 사랑.
말을 더듬는 '괴물'이 독백신에서 정상적인 어투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몇 안 되는 대사에 녹아있는 감정이란. 그 감정을 평소에 모두 털어놓지 못하는 몸이 불편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 안타까움을 가슴속에 안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의 뒤에 나와 조용히 서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극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게 아니야, 그래서는 안되.
극은 당연하겠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쩌면 해피엔딩일 지도 모르지. 그의 주위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 말이다. '괴물'에게 말을 가르쳤다, 감정을 가르쳤다, 인간답게 만들었다, 인간답게 죽었다!
최근 연이어 터져나오던 어린 동생들의 자살 소식이 떠오른다. 세상 끝까지 내몰려 자살을 선택한 가장들도, 힘든 어머니들도, 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셨을텐데 결국 목을 매단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떠오른다.
신부님이 한 번 더 외쳤다. 네가 죽인 것이다. 네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은 것이다.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포스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강한 매력을 지닌 포스터. 그러나 그림보다도 관심이 간 것은 9월 27일~10월 10일의, 고작 2주에 불과한 짧은 공연 기간이었다.
스토리는 상당히 묵직하다. 연인끼리 와서 가볍게 볼 내용도, 추석 때 가족들이 손잡고 와서 볼 내용도 아니다. 그러나 뮤지컬과도 같은 강렬한 오프닝, 외국인 배우 기용에 배우 대부분이 구사한 일본어 대사, 소극장 치고 많은 인원인 14명의 등장인물. 내가 연극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준비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리라 짐작된다. 내용도 좋았고 구성도 좋았다. 초반에는 간간이 뮤지컬같은 연주와 춤, 노래가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국악이다. 배경음악도 물론. 다양한 민요와 국악가락이 시대적 배경과 적절히 어울어져 이것 또한 좋은 느낌을 주었다. 굳이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다. 나처럼 고작 몇 번 연극을 본 관객이 "좋다"고 느낀다면, 그것으로 좋은 게 아닐까?
이렇게나 좋은 작품이, 분명 다른 연극에 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했을 작품이, 고작 2주간의 공연 기간만을 가지고 있다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이 2주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좋은 평이 있어 연장공연, 혹은 추가공연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극장의 다른 관객들이 영화로 치면 엔딩크레딧이랄까- 공연 후의 잠시의 여운을 즐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배우들에게 좀 더 박수를 쳐 주고 싶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지만)환호소리도 날리고 싶었는데. 인사를 마치고 배우들이 나가자마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더라. 나에게는 모두들 무표정한 채로 인사를 하는 모습 또한 엄청난 인상으로 다가왔는데 말이지.
영화관에서는 사람들이 나가든 말든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마지막까지 여운을 즐기는 편이다.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은 속으로 엄청 욕을 하시겠지만, 엔딩시간까지 즐기는 것은 티켓을 가진 나의 권리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소극장에는 억지로 앉아서라도 여운을 즐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바로 눈 앞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니 말이지. 함께 공연을 본 지인도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 탓에 나 또한 일어나 버렸는데, 알고보니 허리가 아파 기지개를 펴신 것이었다. 내가 남아있다면 아마 그 분도 즐겨 남아계셨을 것 같은데, 아이고~
엔딩을 즐기지 않는 우리나라의 관객들, 영화 내용이 끝나면 바로 극장의 불을 켜 버리는 극장들. 모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연극도 정말 인사가 끝나고 바로 문이 열렸다. 적어도 5초 정도라도 불을 끈 채로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는 엔딩크레딧의 마지막 한 줄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불을 켜지 않았었지. 그래서 거기에서 본 영화는 제대로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가보고 싶다.)
그리고 초반의 뮤지컬적 구성이 후반에는 싹 사라진 것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음, 덕만이나 덕철의 가슴아픈 독백 중 한두 번 정도는 노래로 대체해 보면 어떨까? ...배우분이 상당한 노래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할 테지만... 하하. 아니면 그들의 독백에 군무가 배경으로 등장해도 좋을 것 같다. ...적고 보니 의상 교체의 어려움이 예상되기는 하는구나.
두 가지다 결국은 돈으로 이어지려나. 노래 잘 하는 배우를 따로 골라내고, 군무 전문의 등장인물을 따로 만들고. 무리한 요구라는 것은 알지만 초반의 구성이 너무도 좋았기에 살짝 투덜거려본다. 소극장이라는 한계 속에서 이만큼 멋진 연극을 만들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좋은 연극이었다. 관람할 기회를 주신 그 분께 다시 한 번 감사.
생각할 거리가 많다. 오늘 밤은 소설 한 편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아마도 매우 어둡고 씁쓸한 내용이 될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