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면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길 바랍니다, 리나 님.
만일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그때의 전 아마도 수왕님의 부하 수신관으로서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요.」
이런 것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녀석이라면 시답잖은 웃음을 지으며 언제까지나 우리의 여행길에 기웃거릴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떠나야만 한다면 한번쯤은 뒤돌아봐 줄 거라고, 아주 작은 망설임 정도는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시간은 그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서 등을 돌린 그의 뒷모습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그의 ‘볼 일’이 되어줄 수 있다면! 적어도 그의 심연을 거스를 만한 존재였다면 부질없는 짓일지라도 주문을 외워 그의 발길을 막아볼 텐데. 목적했던 명령의 수행이 끝난 지금, 나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다.
「만일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서로 적이란 소리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여본다. 항상 이럴 때면 제로스는 나를 돌아보고, 그리고 웃어주었었다. 웃어주어야만 했다. 내가 그의 말의 핵심을 집어낸 것에 대한 약간의 놀람과 조소로. 하지만 제로스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제로스는 내 쪽을 바라보던 시선마저 그의 어깨 너머에 있는 내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난 그런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겨우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이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세상을 담보로 금기의 주문을 사용한 데 대한 천벌이겠지.
「그럼 제로스, 다시 만나지 않길.」
뒤돌아서 있던 제로스의 어깨가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제로스의 모습은 한 순간 일렁이더니 허공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일렁인 것은 그가 아니다- 아니, 그이다. 그 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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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의 첫 만남은 사이라그에서의 사건이 끝나고 몇 년인가 지난, 추적추적한 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오후였다.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음식 쓰레기 더미. 그 옆에 비에 흠뻑 젖은 채, 홀쭉 말라 앙상한 뼈를 내보이는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있었다. 그는 배를 곯아도 음식 쓰레기 따위는 절대 뒤지는 않았다는 듯 등을 꼿꼿이 편 채로 날카로운 눈빛을 어둠 속에 발했다. 쏟아지는 비속에서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고고하다 못해 오만해 보이는 도도함.
“냐아-”
왠지 언젠가 보았었던 듯한 날카로운 눈매에 잠시 놀라 있던 나는, 단 한번 나를 향해 내뱉은 그의 오만한 울음소리에 그만 반해버리고야 말았다. 그것은 마치 나를 불러 세우기 위한 울음이었던 듯 고양이는 자신에게 손을 뻗는 나를 거부하기는커녕- 그를 안아들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5분이 넘게 걸린 시간동안 단 한번의 울음도 들려주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야속하게도 새로운 친구를 얻은 내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월세방 주인 아줌마였다.
“리나 양, 여기는 애완동물 금지야!”
“……알아요. 얘가 너무 젖어 있어서 잠깐 따뜻하게 해 주려고 데리고 온 것 뿐이에요.”
차가운 가을비에 흠뻑 젖어서, 가녀린 여인의 품안에서 오들오들 몸을 떨고 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그것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몸이 젖는 것을 개의치 않고 꼬옥 안아드는 여인. 만일 이곳이 중년의 아저씨가 운영하는 곳이라면 단번에 OK가 되었을 것을-! 아줌마란 낭만을 잃어버린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임에 틀림없어.
당연히 거짓말이 될 대답을 대충 둘러대고는 일부러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몇 년이 넘게 얌전히 살아 왔으니 이 정도는 애교로 생각하라구요, 아줌마.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화장실의 문을 열고 보송보송한 마른 수건을 한 장 꺼내들었다. 우산을 쓴 덕분에 머리는 젖지 않았지만 고양이를 안고 온 팔과 가슴 깨가 온통 물 범벅이다. 수건으로 가슴부분을 대충 훑어낸 후 바닥에 수건을 깔고 고양이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자아, 고양아~ 너 때문에 나까지 흠뻑 젖었잖아. 물기 닦아줄 테니까 얌전히 있……,
어라? 이 녀석 봐라, 지금 여길 닦아 달라는 거야?”
역시 이 고양이는 뭔가 평범하지 않다. 수건 위에서 다리를 단단히 고정하고 허리를 펴 자세를 잡더니 몸의 젖은 부분을 나에게로 들이밀었다.
고양이 주제에, 건방진 녀석! 하기야 이 녀석의 눈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보통 녀석이 아니란 것쯤은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예상대로 그는 젖은 털을 말리는 동안에도 꼿꼿이 편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물기가 얼추 사라진 후 다시 고양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손으로 슥 훑어주자 털이 몸에 달라붙어 앙상하게 마른 몸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결을 따라 흘러내릴 듯한 윤기는, 이 녀석이 쓰레기장을 전전하는 흔한 들고양이가 아니란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어떤 품종일까?
그의 털은 단순한 검은색이 아닌, 약간의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짙은가. 그래, 바로 보라색이다. 이런 털 색깔을 지닌 생물이 있다니-.
지금까지 그저그런 검은 고양이로만 보였던 것은 털이 물에 젖었기 때문일까? 태양이 구름에 가려 더 어둡게만 보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 눈이 그 색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 지도.
‘촤악!’
난 애써 물기를 닦아낸 고양이에게 물 한 컵을 냅다 들이부었다. 차가운 소리와 함께 이리 저리 튀는 물방울이 내 바지에까지 묻었지만,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다.
“미안. 난 보라색이 싫거든.”
“냐아-”
고양이는 두 번째로 울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지만 고양이 역시 다를 것은 없다. 내가 왜 기껏 말린 몸에 물을 부어 또다시 그를 젖게 만들었는지- 분명 알 리가 없을 테지만 그는 그저 나를 응시했을 뿐이다. 그의 털보다도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한 채.
보통의 동물들처럼 몸을 털어 물기를 떨어뜨리는 부산스런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그에게, 나는 다시 한번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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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은 바로 그 날 밤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아니, 이것을 과연 악몽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간간이 꾸는 똑같은 꿈속에 등장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실루엣일 뿐이다. ‘그’는 창을 향해 서서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으며 나에게 흐릿한 뒷모습을 비치고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어둠에 녹아들 듯 사라져버리고 만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찔할 정도로 끔찍한 악몽……! 가위에 눌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내 몸은 무언가 무거운 것에 눌린 듯 어둠 속에서 온 몸이 경직되고 시선은 실루엣을 향해 고정되며, 심연 아래 가라앉은 진흙이 맑은 수면위로 올려보내 진다. 이미 잊어버린, 잊으려 노력해 억눌러진 것들이 다시금 올라와 나를 온통 뒤흔든다.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몇 번이나 기억해 낸다는 것. 이보다 잔인한 악몽이 또 있을까…….
악몽의 시간이 끝나 ‘그’가 떠나가고 겨우 풋잠에 빠져들었을 즈음. 아침의 햇살은 이불 속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온다.
“냐옹~”
늘 이런 아침이면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그리고는 내가 몽유병 환자라도 되어 나도 모르는 채 돌아다니는 것인지 아니면 고양이에게 재주가 있는 것인지, 아무튼 창문이 열려있어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맛보게 된다. 마치 악몽을 꾸게 된 데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다. 잠결에 답답한 마음으로 내가 창문을 열어젖히는 것일까? 고양이가 악몽에 괴로워하는 주인님을 위해 창문을 열어주는 것이라면 그것도 참 낭만적일 텐데. ……아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역시 이것은 꿈일 뿐이니까. 예전에 잊어버린 일이 가끔씩 떠올려지는 것뿐이다.
“자아~ 아침 먹자. 오늘도 따뜻한 우유 한 잔?”
“냐~”
파문이 일어온다. 무섭도록 매섭고 날카로운 이 녀석의 보랏빛 눈동자는, 때때로 누군가를 향한 것인 지 알 수 없는 아주 조그마한 파문을 그의 심연 안에 일으키곤 한다. 아마도- 나로 인한 것이 아니리란 것은 확실하다. 이 녀석이 좋아하는 것을 준다면, 그의 취향을 맞추어 준다면 적어도 지금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런 꿈을 꾸는 밤이면 나는 어둠 속의 그의 존재보다도 엄습해오는 어떠한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곤 한다. 그것은 아침에 열려있는 창문과 나를 깨우는 이 녀석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에야만 안정이 되는 이상한 것. 지난밤에 보았던 모습이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하지만 이 기원의 이루졌는지, 그것은 아침이 되기 전까지 확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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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륵’
가게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즐겁게 느껴지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다. 여행의 자유로움과 두근거림이란 것을 잃어버린 나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함께 할 줄 알았던 나의 동료들 역시 ‘어른’이 되고야 만 것이다. 그나마 정착의 초기에 간간이 찾아왔던 그들의 발걸음도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지 오래.
하지만, 혼자서 여는 가게의 문은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가 않다, 라는 매일의 투정은 이제는 취소!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도 짐작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 가게 안에는 나 이외의 온기가 있다. 그건,
“어이 리나 양! 오오, 오늘은 내가 첫 손님이군. 아침정식 A부터 C까지 부탁해.”
“네에~ 가 아니지. 아저씨, 여긴 식당이 아니라 마법도구 상점이라고 몇 번을 말했잖아요!
앗,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리에 앉다니!”
……절대로 이 무례한 아저씨가 아닌, 고양이, 고양이야. 절대로!
월세방 아줌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종종 아침재료를 사 가지고 가게로 오기는 하는데, 도대체 이 아저씨는 어떻게 안 것인지 그 때마다 뻔뻔하게도 내 식사에 끼어드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터라, 내가 즐겨 먹는 메뉴마저 꿰뚫어 제멋대로 아침정식 A 등의 이름을 붙이기에 이르렀다.
“새삼스럽게 뭘 그래. 동네 식당 따위보다는 훨씬 솜씨가 좋다는 것 모르는 사람이 있으려고.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탁자에 그것이 없네? 따뜻한 우유였던가.”
이렇게 말하던 아저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그의 발 아래를 향해 고정시켰다. 무언가 조그마한 것이 그의 발목을 건드린 것이다.
“……”
“야옹아 잘~했어! 좀 더 세게 물어버려!”
“어허, 새 식구가 있었구만- 네가 우유를 마셨구나! 하지만 그건 안 돼. 그 우유는 말이지, 리나 양이 자길 버리고 떠나간 애인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따라둔 거거든.”
과연 따끔하기나 했으려나? 손등에 털이 덥수룩하게 덮인 투박한 손으로 고양이의 목덜미를 집어 들어서는 저쪽으로 툭 던져버린다. 에그, 저 조그만 것을- 하지만 약아빠진 저 녀석은 공중에서 핑그르 한 바퀴를 돌아 앞발로 안전하게 착지를 했다.
이 능글스런 아저씨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을 돌려서 하곤 한다.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우유 한잔을 새로 컵에 따라 아저씨에게 내어주었다.
“하여간 고양이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다니까. 부인이랑 또 싸워서 적적하실 진 몰라도 이 고양이한테 손대진 말아요. 이래봬도 수컷이거든. 그 우유는 내가 마시려고 따라두는 거니까 마을에 이상한 소문 좀 퍼뜨리지 말구요!”
이 곳은 즐겁다- 그래, 그렇다고 느끼고 싶다. 스스로에게 짜증이 날 정도로 정체되어 있던 머릿속을 잔뜩 흩뜨려놓는 건 바로 이 속을 박박 긁는 아저씨 이외엔 없다. 내가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것은 그들과 헤어지고 난 후 아저씨의 앞이 처음일 것이다. 덕분에 아저씨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나를 아주 참한 처녀로 보고 있어서, 오히려 더 스트레스가 쌓이는 걸지도 몰라(후후).
“응? 그러고 보니 오늘 이상하게 밝은 표정인데……. 그렇지. 애인이 돌아왔구나! 이야 축하해~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아침정식 E도 추가!”
“흥, 애인은 무슨! 조금만 기다려요. 아무튼 나도 아침을 먹어야 되니까. 그리고 식사비 또 떼어먹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마음껏 소리를 치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사실 강하지 않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방어책이다. 기분이 나쁜 듯 말을 하지만 위로 받고 있는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받아줄 친구들이 없는 이곳은 너무나도 외로운 곳이야. 가게 한편에 마련된 조그마한 주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틀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이지… 시끄럽다. 생긴 것은 꼭 어디의 산적 나부랭이같이 투박하게 생겨 가지고는, 남자 주제에 끝도 없이 입을 나불대곤 한다.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시끄러워-.
∽
그 뒤로 며칠이 지났다. 그때의 일 뒤로는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주 조금씩이지만 새로운 것이 나를 채워가고, 옛날의 것은 희미해져 간다. 그렇지만 어떤 옛날의 것은 너무나도 선명해 오히려 새로 채워 넣은 것을 갉아먹곤 한다.
망설여봐. 적어도 ‘안녕’이란 말을 떠올리며 한 번 쯤 뒤돌아봐. 난 고작 그런 존재밖에 되지 못했던 거야? 목적한 일이 끝나면 그걸로 끝, 아쉬움 같은 것도 없어?
하늘을 보기가 싫었다. 마지막이 되었던 그 날, 그의 뒤에 남은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땅을 볼 수도 없다. 사라진 잔상 뒤에는 발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다.
시야를 둘 곳을 찾지 못해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쿵!’
……잊고 있었다. 내가 있는 이 곳은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거리라는 것을. 얼굴을 부딪친 후 다시 뜬 눈의 사이로 커다란 남자의 등이 보였다.
“아, 미안합……,”
검은 망토의 나부낌. 이마 끝에 닿는 어깨의 높이. 가냘프지만 단단한 익숙한 실루엣. 그리고 짙은 보랏빛 잔상.
-아니다. 그가 아니다.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한가하게 걸어 다닐 그도, 내 앞을 걸어가고 있을 그도 아니다.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사내의 한 쪽 어깨를 세게 잡아당겨 보았다. 혹시라도, 만약 만 분의 일이라도 그의 행동 패턴에 변화가 생겼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아니. 그저 확인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는 내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콜록,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아니에요, 사람을 잘못 봐서. 미안해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귀찮은 확인을 하는 것은 단지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나는 또다시 악몽을 꾸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은 열려있었지만,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없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짐작했던 것이라 생각만큼 놀라지는 않았어도 역시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털 한 오라기 남기지 않은 그의 뒷길 위로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그 뒤로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악몽을 꾸는 일도, 아침에 창문이 열려있는 일도 없었다. 나를 깨우는 것은 동네 아이들의 시끄러운 장난소리.
이 지긋지긋한 가을비는 그치지도 않는가 보다. 오늘밤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
며칠이나 지났을까- 고양이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돌아왔다. 순간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무얼 하다 왔느냐고 추궁하고 싶었지만 그걸 알아들을 녀석도 아니다. 아니…… 이 고양이라면 꼭 알아들을 것만 같지만, “어디에 다녀왔다”고 말을 한들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겠지. 하아.
고양이는 마치 인사를 하듯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다시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이 문 밖을 향한다.
‘잠깐만… 다시 나가려는 거야? 어째서?’
당장이라도 소리를 쳐야만 했다. 혀의 안쪽에서 맴도는 소리를 꺼내려 애를 썼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햇빛에 반사된 매끄러운 등의 곡선이 선명한 보랏빛을 띠었기 때문일까?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그를 따라 나섰을 때, 막 벽을 돌아섰을 터일 고양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그날 밤엔 꽤나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실루엣을 비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생각해 보면 악몽이 시작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생각하도록 억눌러왔었다.
매일 밤 지겹도록 내리던 비가 오늘에야 그쳐 실루엣은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옅어진 구름이 달빛에 밀려났을 때 그의 실루엣의 무언가가 아주 조금 달빛을 반사했다. 그것은 그가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가슴 깨에 나란히 자리한 세 개의 반사된 빛의 붉은 잔상-.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이 미치는 데에는 단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
나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질렀을 때, 당황한 것은 나뿐 아니라 실루엣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작은 어깨의 흔들림,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엄청난 놀람을 의미하는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대로 아무런 변화 없이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실루엣은 다시 한번 움직임을 보였다.
“……리나 님- 저, 그러니까 이건 말입니다,”
「다시 만날 때에는 서로 적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이렇게 말했던 것은 나였었나 아니면 그였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이 만일 그의 말이었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나의 말이었다면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수신관이라거나 그런 것으로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제 멋대로-,”
-둘 중의 누가 말했던 것이든, 더 이상 나와 그는 만나서는 안 된다. 다시 만났을 때에는 수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수신관과 한 인간으로서, 적으로서의 관계가 되어 있어야만 했으니까. 난 그 말만을 떠올리며 이 몇 년간을 살아왔으니까.
그러니 난 예전 한 번의 헤어짐 이후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처음으로 악몽을 꾸었을 때부터……? 아니, ‘그’와 같은 눈빛을 한 그 녀석을 만난 순간부터 다짐했던 것.
“……야옹아,”
나즈막한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어깨의 작은 흔들림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또 산책 나가려고? 이번엔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
어둠 속의 침묵은 이젠 예전처럼 차갑지 않았다. 한순간 멈칫 움직임을 잃은 그도 잠시 후엔 평소와 다름없는 유들유들한 망토의 흔들림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저 얼굴은 언제나의 웃음을 띠고 있을 것이다.
“냐옹~”
다시 창문이 열리고 실루엣은 사라졌지만 불안함은 없다. 분명 내일 아침엔 열려진 창문과 함께 나를 깨우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있을 것이다.
떠나야만 한다면 한번 쯤 뒤돌아봐 주기를. 적어도 그런 망설임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랬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단 한 번의 울음소리로 눈을 막고 귀를 닫았던 나에게 알려주었다.
난, 그래도 그의 공허한 심연 위에 작은 파문 하나는 일으킨 것 같다.
햇살의 눈부심으로 눈을 뜰 아침을 기대하며 기나긴 악몽을 접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미치도록 좋아했던 슬레이어즈, 그 열정이 이제는 식어버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재속에 불씨가 고이고이 숨겨져 있더군요. 장작도 넣고 기름 좀 부어주니 활활 잘 타오르더이다(…). 예전보다 더 모자라진 글이지만 끄적이는 동안 마음은 한결 편해진 듯해요.
프롤로그랄까, 도입부는 슬레이어즈 소설 8권에서 따온 것입니다. 소설 속에서 둘은 담담한 태도로 헤어지지만 만일 그것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거기에서 모두의 여행이 끝나버렸다면 어땠을까.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즐겁지만 기존의 스토리를 아주아주 약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뻗어나가는 망상.
결과물이야 어쨌든 과정은 재미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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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3 슬레이어즈 팬사이즈 린젤(http://linzel.net)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