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나라 2부 - 09
2부、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이건……?”
익숙한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소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엉겨붙어 바닥 위로 흐트러졌다. 그리고 무수한 생채기가 남은 잿빛 피부.처참한 몰골의 소녀— 아멜리아를 보며 가우리가 탄식했다. 가우리가 떨리는 손을 아멜리아에게로 뻗었다. 그 손 끝이 어깨에 닿자 아멜리아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으음. 가우리 오빠……?”
“응 그래, 우리야. 괜찮니 아멜리아?”
아멜리아는 아직 몽롱한 듯 눈을 깜빡거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깔끔했을 집무실은 온갖 집기들이 부서져 있었고 여기저기 찢겨진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 곳에 있는 사람은 어딘가 지쳐보이는 리나와 가우리 뿐. 아멜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아, 그런가요. 절 구하러 와 주신 거로군요.”
“응, 이제 괜찮아.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아니, 대체 언제부터……. 밥은 제대로 먹은 거야?”
“잘 모르겠어요. 마족이 갑자기……. 이제는 괜찮은 거겠죠……?”
아멜리아가 중얼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가우리가 아멜리아를 부축했고 리나도 다가가 손을 보탰다. 리나가 아멜리아의 한쪽 손과 어깨를 잡았지만 아멜리아는 리나의 손을 맞잡을 기력도 없는 모양이라 힘으로 아멜리아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가장 가까이 있는 벽에 아멜리아를 기대어 앉혔다.
“잠깐만 기다려. 뭐라도 먹을 걸 갖다줄게. 가우리, 넌 아멜리아를 안쪽 방에 좀 눕혀줘.”
“응. 그런데 그 방이 음식들이 쌓여있던 방 아니야? 냄새가 많이 날 텐데.”
“아 그런가? 그럼 경비병에게라도 말해서 쉴 수 있는 방을 준비해둘게. 금방 다녀올—,”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리나는 집무실의 문 쪽을 향해 옮기던 걸음을 천천히 멈추었다.
“왜 그래, 리나?”
“…….”
가우리와 함께 집무실에 남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겨댔을 때 관리들이 뭐라고 했었지? 바로 식사를 가져다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집무실의 문은 조금 전 드래곤 슬레이브의 여파로 비스듬히 부서져 있었다. 그렇다면 결계 때문에 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이닥칠 법도 한데, 문 밖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문 밖에는 아무도, 경비병조차 없는건가? 아니면 다시 결계가……?
리나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성 주변을 오가는 병사들이 보였다. 결계는 깨진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만 미미한 독기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키르샤가 소멸되지 않고 주변에 있다는 사실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조금 전의 ‘명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거지?
리나가 몸을 휙 돌려 아멜리아가 앉아있는 곳까지 돌아갔다. 가우리는 여전히 그 옆에서 있으면서 아멜리아의 몸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아……!”
리나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가우리의 팔을 잡고 자신이 있는 쪽으로 황급히 잡아당겼다. 가우리가 기우뚱하려는 몸을 간신히 바로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리나? 다칠 뻔 했잖아.”
“아냐, 가우리. 이건…… 아니야.”
“응? 뭐라고?”
아멜리아가 의아하다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장난을 치는 것이냐며 살풋 웃었다. 그러나 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젔고는 가우리를 붙잡은 채로 한 발짝 더 물러났다.
“아냐, 아니라구. ……어째서 또 아멜리아의 모습을 하는 거야, 키르샤?!”
리나의 외침에 가우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한번 더 웃었다. 이번에는 아쉽다는 듯이. 잠시 후 그녀는 완연한 키르샤의 표정으로 돌아와 가우리를 보며 조소를 던졌다.
“이거 또 실패했네. 가우리 오빠는 완전히 넘어온 것 같았는데, 둘이 번갈아가면서 이러기야? 너무하잖아.”
키르샤는 태연하게 몸을 일으켜 먼지를 털어내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잠시 후 휘청 흔들리더니 등 뒤의 벽에 몸을 기대고 섰다. 결계마저 깨진 것을 보면 그녀가 받은 타격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키르샤가 키득키득 웃어댔다.
“뭐……라고? 이게 무슨 말이야, 리나……? 그럼 아멜리아는? 그 아이는 어디있는 거야?”
“글쎄. 어디에 있을까? 미안하지만 지금은 보여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당장, 당장 그 모습을 바꿔! 아멜리아를 데리고 오란 말이야!”
“실례인걸, 내가 이 나라의 ‘아멜리아 윌 테슬라 세일룬 왕녀’라고. 국왕 대리의 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지 않겠어?”
너무도 당당히 키르샤의 말에 가우리가 짧은 한숨을 토했다. 간신히 되찾았다 생각했는데 그저 키르샤의 손에 놀아난 것 뿐이었을 줄이야. 정말 아멜리아를 찾아냈을 때에도 그 아이를 의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만일 잘못 짚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잘도 그런 헛소리를……! 대체 뭘 꾸미는 거야?”
“아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마족이 움직이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라고 말이야.”
“……!!”
빠져나오려는 숨을 억지로 삼키는 리나를 보며 키르샤가 조소를 지었다.
“한심하기는. 대체 어디까지 설명해주길 바라는 거야? 뭐, 정 못알아듣겠다면 디루스 왕국 같은 거라고 해 둘게.”
“디루스……라고?”
낯익은 나라의 이름이 나오자 가우리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나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 끝을 흐렸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는 없었다. 발길은 억지로라도 끊을 수 있었지만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대륙의 북쪽 끝에 닿아있는 디루스 왕국. 디루스는 몇 년 전 일어난 어떤 사건을 계기로 군사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주변국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행가들에게도 여러 제약이 붙었다. 때문에 타국인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방문을 꺼리는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리나 역시 최근 몇 년 간 디루스에 들른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디루스를 바꾸어버린 ‘그 사건’은 리나와 가우리가 관계했던 일이었다. 패왕 그라우세라가 국왕을 대신하고 그의 심복 쉐라가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어 도성 전체를 공포로 뒤엎었던 것이 벌써 3년 전의 일. 당시 그들이 밝힌 목적은 ‘점심식사’였다.
키르샤가 말하는 ‘디루스’라는 키워드에 해당하는 것은 당시 패왕이 일으켰던 그 사건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알아낸 사실에 놀라는 것도 잠시, 리나는 뒤따른 두려움에 온 몸을 떨었다. 그 사건의 숨은 목적을 알고 있기에.
“그럼, 너희 마족들은 또 다시 마왕의 봉인된 조각을 찾아내려고 이런 짓을……!”
중얼거리는 리나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고작 몇 년이나 지났다고 또 다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지? 마족 녀석들은 이번에야말로 이 세계와 끝을 보려는 건가? 아니면 해왕 역시 그 때부터 일을 꾸며온 걸까? 그렇다면 아멜리아는 대체 언제부터……?!
리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키르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키르샤는 그런 리나의 반응이 유난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흐응, 그야 그렇게 이어진다면 우리로선 더 바랄 게 없긴 한데. 그걸 바라는 거야, 리나 인버스?”
“?!”
“아쉽게도 피브리죠 님도 안계시고 쉐라 님의 둘고퍼 같은 것도 없는 나로선 무리야.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말이야.”
“그럼―,”
“우리는 그저 싸움을 바라고 있을 뿐이야.”
“싸움……이라.”
리나가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나라의 왕궁에서도 이와 같은 말을 들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이제 3년 쯤 지났나. 그 때는 참 재미있었어.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잖아? 그렇지만 지금은……. 이건 마치 호화로운 코스 요리를 먹다가 갑자기 마른 빵 한 조각만 나온 것만 같다니까. 우리는 말야, 잔뜩 굶주려 있어. 이러다가 굶어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헛소리를 하는군. 마족이 굶어 죽을 리가 없잖아.”
“아하, 물론 그렇겠지? 너희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쿡쿡. 어쨌든 굳이 말하자면 ‘그거’라는 거지.”
키르샤의 어깨가 들썩였다. 말을 마치고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지 키르샤는 계속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언제라도 최상의 식사를 하고 싶지만,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기엔 알다시피 마족의 전력이 상당히 약해진 상태야. 누구누구 덕분에.”
“흥. 그럼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냐?”
“끝까지 들어봐, 성격 한 번 급하기는.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복수라니, 네가 제 발로 찾아온 것 뿐이잖아? 내가 세일룬에 너희를 불러들인 것이 아니란 말이야. 다 차려진 밥상에 잿가루를 뿌리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야, 리나 인버스.”
“……!”
결국 리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키르샤에게 달려들었다. 가우리가 가까스로 리나를 붙잡아 키르샤와의 접촉을 막았다. 그런 둘을 보며 키르샤는 아쉽다는 듯이 킥 웃었다. 그런 그녀의 손 위에서 작은 마력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우리가 키르샤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할 게 있으면 얼른 말하고, 아니면 사라져. 너 따위가 아멜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으니까.”
“와, 가우리 오빠도 이제 좀 냉정해졌는데? 쿠쿡.”
“너……!!”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튼 요약하자면, 이래저래 전력이 약해진 통에 말이야. 우리는 다른 장기 말을 움직여서 인간들의 마이너스 에너지를 끌어내보려는 거다, 라는 이야기야. ……이렇게 말하면 머리 좋은 ‘리나 언니’는 이해할 수 있겠지?”
리나가 눈을 부릅떴다. 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부족한 전력으로도 일궈낼 수 있을 ‘밥상’. 그들이 말하는 ‘굶주림’을 해소해 줄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상황, 또는 사건. 가능했다. 이 상상이 맞다면, 단 십수 명의 움직임만으로 국가, 더 나아가선 대륙 전체 규모의 ‘잔칫상’이 차려지는 것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전에도 일어난 적이 있는 일이었다. ―천 년 전, 항마전쟁 때에.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거냐……?!”
리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키르샤는 비장한 리나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천만에. ‘식사’를 할 뿐이라니까?”
“……식사라. 패왕도 처음에는 그렇게 말했었지. 너희의 말 따위는 믿을 수 없어. ……그래, 식사든 전쟁이든 아무래도 좋아, 아멜리아는 어디에 있지?”
“상관없어. 믿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그런데 믿지 않겠다면서 또 질문을 하는 거야? 너도 참 웃긴 녀석이네~.”
또 다시 비꼬는 듯한 키르샤의 말에 리나가 고함를 지르려다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물러섰다. 키르샤의 말마따나 자신이 질문을 하고 답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마족이 이렇듯 친절하게 설명을 하는 일은 흔치 않다. 키르샤도 말했듯이 ‘마족의 목적은 하나’뿐이며 이런 설명은 자신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봐, 이걸 나에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야? 너희들이 일으키려는 전쟁을 내가 막으려들 텐데.”
“흐응, 아까는 기세가 등등하더니 많이 얌전해졌는데. 왜, 듣고 나니까 무섭기라도 한 거야?”
리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두려웠다.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패왕 그라우세라가 디루스 왕국에서 날뛸 때에 미르가지아는 이를 두고 ‘항마전쟁의 재림’과도 같다고 말했고, 마왕…… 루크도 같은 말을 했었다. 세일룬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해왕도 같은 목적이 아니리라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려움에 젖은 리나의 감정을 즐기며 키르샤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자신이 대단한 줄 아나 보지, 리나 인버스? 웃겨. 고작 인간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아아~ 말리지는 않을게. 원한다면 맘껏 날뛰어. 그럼 더더욱 절망하게 될 테니 우리로선 대환영이지, 후후. 어디 한 번 뼈저리도록 절망해봐. 너도, 지금 저기에서 엿보는 아저씨도― 말이야.”
“뭐? 그게 무슨……?”
리나와 가우리가 키르샤의 시선을 채 따라가기도 전, 키르샤의 손에 들려있던 힘의 덩어리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조금 전 부서진 집무실의 문, 그 틈으로.
소리 없는 비명이 문의 틈새를 타고 들려왔다. 이런, 누군가가 문 앞에 있던 거야! 리나가 급히 문 쪽으로 내달렸고, 가우리도 곧 뒤를 따랐다. 조금 전의 싸움으로 약해졌다고는 해도 상대는 해왕장군이었다. 일반인의 접근은 너무도 위험했다.
가우리가 부서진 문의 조각을 들어올렸다. 그 뒤에 있던 자는 조금 전의 키르샤의 공격을 맞은 것인지 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익숙한 얼굴을 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맙소사, 크로펠 씨?!”
“아아……, 리나 군인가. 이거 들켜버렸구먼.”
“왜 여기에 계셨어요? 괜찮아요, 크로펠 씨? 아까 그걸 맞은 거에요?!”
“난 괜찮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혹시 명령을 어겼다고 왕녀님이 진노하신 건가?”
크로펠이 천천히 말을 잇다 기침을 몇 번 했다. 다행히 기침에 피가 섞인 듯 하진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 힘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보다 어디에 맞은 거에요? 배?”
크로펠이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엔 수심으로 얼굴이 그늘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었지만 아마도 충격파일 그 공격에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가우리가 말 없이 크로펠을 문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크로펠은 이동 중에도 충격이 부담스러운 듯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키르샤, 너!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공격하다니?!”
“상관? 있어. 이 나라의 대신인걸.”
“그게 무슨……?”
키르샤는 대답 대신 흘깃 집무실의 문쪽을 바라보았다. 가우리가 문의 잔해를 치운 덕에 문 너머로 집무실 정면의 복도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어째서인지 문의 바로 앞에 있던 것은 크로펠 뿐, 경비병 같은 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멀리 복도의 안쪽에서 여러 명이 달려오는 듯한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예정과는 다르게 되었지만, 나쁠 것은 없겠어. 저 노인네는 사사건건 방해이기도 했으니까 오히려 잘 된 것도 같네.”
“예정이라고? 역시 뭔가를 꾸미고 있군! 맞지?!”
“……내가 분명히 말했지? 혼자서 처리할 일이 있으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몇 시간이라도 더 혼자 있고 싶다고 했었는데 내 말을 무시하고 억지로 들어온 것은 바로 너희들이야. 자, 그럼 왕녀님의 말을 듣지 않은 벌로 맘껏 날뛰어줘.”
키르샤는 씨익 웃더니 벽에 줄곧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버팀목을 잃은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힘을 주어 간신히 일어서고는 집무실의 안쪽 방들로 이어지는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기 서!!”
리나와 가우리가 키르샤를 뒤쫓아 달려갔다. 크로펠의 치료도 급했지만 키르샤를 이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곧 누군가가 도착할테니 그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키르샤는 달려오는 리나를 보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바람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예의 검은 안개 한 줄기가 리나에게 뻗어나갔다. 리나는 예상했다는 듯 달리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왼쪽으로 크게 도약하였다. 검은 안개는 이전보다 기세가 약해진 듯 속도가 점차 떨어져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윽고 검은 안개가 거의 정지 상태에 이르렀고 리나는 키르샤를 향해 이동방향을 바꾸려 발을 멈추었다. 바로 그 때, 검은안개가 공기 중으로 스며들듯 넓게 번졌다.
“!”
“리나!”
간신히 방향을 바꾼 직후였다. 한껏 흐트러진 자세로 무형의 적을 피할 타이밍을 잡기란 어려웠다. 리나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몸을 뒤로 젖히며 단검을 빼어 쥐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검에는 효과가 없었던 것 같으니 단검을 방패로 쓸 요량이었다.
다행히도 안개는 면적을 넓히며 힘을 잃은 듯 흐릿해져갔지만, 그 끝자락이 리나의 얼굴 앞을 막아선 단검에 닿고 말았다. 검은 안개가 단검을 감싸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 뭐, 뭐야?!”
순식간에 짧은 검신의 절반 정도가 검은 안개에 휘감겼다. 안개는 더 올라오려는 양 꿈틀거렸다. 리나가 놀라며 검은 안개를 떨쳐내려는 듯 단검을 휙휙 저었지만 떨어지기는커녕 손잡이를 향해 스물스물 번지고 있었다. 리나가 질겁하며 검을 멀리 던져버렸다.
“리나, 괜찮아?”
“아, 난 괜찮아. 그런데 내 검이…….”
가우리가 검은 안개를 브러스트 소드로 휘둘러 없애며 리나에게 다가갔다. 리나는 바닥에 던져진 자신의 ‘단검이었던 것’에 시선을 준 채 굳어 있었다. 바닥에 남아있는 것은 잔뜩 녹이 슬어 형태를 채 유지할 수 없을 지경이 된, 마치 수백 년은 지났을 것 같은 쇠붙이처럼 보였다.
“부식?!”
처음 검은 안개에 피해를 입은 것은 리나의 망토였다. 안개가 스며든 모양이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삭아서 없어진 것이었다.
“그런 것 같네. 어째서 내 검에는 통하지 않았던 거지? 내 검도 쇠로 만든 거잖아.”
“그야 브러스트 소드는 주위의 마력을 흡수해 예리함으로 바꾸는 것이니까. 아마도 저 검은 안개의 마력을 흡수해서……, 아차, 키르샤는?!”
잠시 정신을 판 사이 키르샤는 어느 새 집무실 안쪽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 숨이 찬 듯 보였지만 곧 승리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여유만만한 얼굴을 되찾았다. 키르샤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존재의 이유가 다른 두 종족이 서로를 이해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 너희들이 우리를 방해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 맘껏 날뛰어 보도록 해. 그것 또한 우리에겐 맛있는 간식거리가 될 테니 말이야.”
“잠깐만, 아멜리아는? 아멜리아는 어디에 있는 거야?! 그것만이라도 말해줘!!”
“아, ‘이 녀석’? 그야 고귀한 왕녀님이니까 당연히 성 안에 계시지. 걱정 마,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안녕―.”
“거기―,”
“무슨 일입니까, 왕녀님?!”
키르샤가 문을 닫은 것과 병사들이 집무실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가우리가 허겁지겁 문을 열고 뒤쫓았지만 이미 그 곳 어디에도 키르샤의 모습은 없었다. 여섯 명의 병사들은 산산이 부서진 집무실의 문을 보며 당황하다 그 앞에 쓰러져있는 크로펠을 보고서는 더욱 놀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서진 문과 쓰러진 크로펠, 그리고 그 앞에는 검을 들고 있는 검사. 그리고 조금 전 아멜리아 왕녀는 헤진 몰골을 한 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집무실에 알 수 없는 이방인이 무기를 들고 서 있다는 하나로 모든 것은 설명되었다.
“네 이놈들!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아멜리아 왕녀님께도 손을 댄 것은 아니겠지?!”
“어? 아, 이건 말이에요. 그러니까,”
가우리가 검을 들고 있던 두 손을 바라보다 난처한 듯 말을 흐렸다. 곧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듯 비어있는 두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병사들의 눈에는 이미 경악과 분노가 가득했다. 리나는 설명 대신 카오스 워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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