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O V E L/단편, etc

[제르&레조] 할배를 찾아서(가제(뻥)) (2013)

waitress 2013. 5. 11. 22:11

 

 

 

헤아릴 수 없을 긴 시간동안 합성수의 몸을 되돌릴 단서를 찾기 위해 곳곳을 돌아다녀왔다. 특히 레조의 실험실에 대해서라면 눈에 불을 켜고 숨겨진 창고까지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 모든 실험실들은 레조의 죽음 이후 그가 설치해 두었던 주문으로 한 날 한 시에 불타올랐다. 무력한 나의 두 눈은 이미 하얗게 바래버린 잿더미를 바라보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절망의 그 끝을 걸어가던 중 정말, 정말 우연히도 형체가 남아있는 실험실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이 실험실은 내가 인간의 몸이었던 시절에 레조와 찾아왔던 곳이다. 그러나 머물렀던 기간이 극히 짧았던 탓인지 믿기 어렵지만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어쩌면 레조 또한 이 곳을 잊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실험실에 마법을 걸어둔 그가 단 한 곳만을 빠뜨렸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이 곳은 아니겠지만…….”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합성수에 대한 레조의 연구 자료. 그러나 내가 인간이었던 당시에 레조는 한창 피부병에 적용할 치유마법에 골몰해 있었다. 마도사로서 흥미로운 것을 찾아낼 수는 있어도 나에게는 의미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건물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실험실이라는 것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레조가 남겨놓은 유일한 단서인 셈이니. 희망은 점차 부풀어 올랐고 이윽고 희열과도 같은 기대가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간절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현관의 손잡이를 건드리는 순간 건물 전체가 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그 불은 그 어떤 물과 바람의 마법으로도 꺼트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이 일대는 작은 시냇물조차 흐르지 않는 건조한 땅. 어디에선가 물을 길어와 불을 끄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물의 마법에도 반응하지 않는 불이 실제의 물에 의해 꺼질 리도 없다.


 

“제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건가!”


 

마법의 화염은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상당히 넓은 규모의 3층 건물이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리고 불길은 건물을 완전히 삼킨 후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그 뒤에는 잔재조차 남지 않은 잿더미만이 있었다. 보통의 불이었다면 건물이 전소되더라도 골격은 남아있겠지만 이 불은 마치 ‘파괴’를 목적으로 한 것인 양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도 이 곳을 보이기 싫은 것이냐, 레조…….”


 

최후의 최후인 단서마저 이제 날아가 버렸다. 급속한 탈진감이 몰려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레조는 과연 전설의 현자로 추앙될 만한 자였다. 폭발도 붕괴도 아닌 전소, 그것도 기둥 하나 남기지 않은 채로―. 이러한 수준의 주문을 시전자가 죽은 이후에도 작용되도록 능수능란하게 조정하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과연 그의 지식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나 또한 생전의 그처럼 평생을 이룰 수 없는 꿈에 매진하는 것은 아닐까. 단 한 방울일 지언정 내 몸속에 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상, 나는 같은 운명에 매여 버린 것은 아닐까.


가슴이 갑갑했다. 목 언저리가 어쩐지 먹먹해져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런 몸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오늘은 흐를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계의 지식을 망라한 클레어바이블, 고대의 유적이나 마도사들의 기록. 모든 것에서 절망을 맛보았지만 그래도 그 어느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 바로 레조의 연구 자료가 아니었던가. 차라리 모든 연구실이 모두 부서졌다고 알고 있어야만 했다.


단 5분에 불과하지만 멀쩡히 서 있는 이 건물을 바라본 것이, 그리고 그 최후가, 간신히 나를 지탱해오던 한 가닥의 끈을 잘라버렸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제르가디스 군. 내가 죽으면…….”
“음? 지금 뭐라고 했어, 레조?”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날 레조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레조와 함께 지내게 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처음 올린 말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싱겁기는. 내가 죽을 때까지는 계속 살아있을 거잖아, 현자 나리? 그리고 날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으면서. 벌써 죽으면 곤란한데.”


 

이 말은 진심이다. 지금의 나는 실력이 떨어지는 검사이자 마도사 견습생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만의 하나라도 레조가 죽어선 곤란한 거다.


레조의 늘 감겨 있는 두 눈이 바르르 떨리다 가라앉았다.


 

“후후, 그렇긴 하겠군요.”


 

레조는 나의 조부이다. 이것은 편의상의 호칭으로 실제의 레조는 조부의 조부 뻘은 될 것이다. 넘치는 마력이 생명력으로 화한 덕에 그는 젊은 시절의 모습을 유지한 채 백수십년의 삶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슬슬 마력이 소진될 만도 한데 그의 마력용량은 젊고 팔팔한 나의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잠시의 침묵 이후, 레조가 마도서를 읽던 나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을 한두 차례 쓰다듬었다.


 

“뭐, 뭐야, 갑자기.”
“마을에 피부병이 돌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제르가디스 군은 전염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을에는 가지 마십시오. 제르가디스 군에게는 면역이 없으니 병에 감염될 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만 아이 취급 하기냐?”


 

볼멘소리로 말하자 레조가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이래봬도 당신의 할아버지인 걸요.”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겠지. 그런데 갑자기 죽는다는 이야기는 왜 꺼낸 거야? 설마 피부병을 고쳐주다 죽을 까봐서?”
“그럴 리가 있나요? 이 레조가 그렇게 약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직 치료법을 개발하지 못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꽤 지독한 병인 것 같더군요.”


 

레조가 말을 마치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손등을 쓰다듬었던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러니 마을에는 절대 내려가시면 안됩니다.”
“그래. 알겠어.”


 

짧게 대답하고는 레조에게서 손을 빼내었다. 아직 읽어야 할 마도서가 많다, 나는 갓 마법을 익히기 시작했을 뿐이니까. 레조가 그런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니, 감긴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해가 산을 넘어간 뒤였다.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잿가루만이 이 곳에 건물이 존재했음을 알려주었다.
이 곳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기에 억지로 발을 움직였다. 방향도 거리도 모를 곳에서 발견한 작은 마을 하나. 골목 어귀에 있는 식당의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살찐 중년의 여인이 밝은 목소리로 달려 나왔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식당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남아있는 곳은 구석의 두어 테이블 뿐. 지금의 내게 딱 어울리는 곳이다.


 

“정식 1인분, 그리고 홍차 한 잔.”


 

내미는 메뉴판은 거절했다. 어느 음식이 나오든 무슨 상관이랴.


 

“……아니, 위스키 한 병.”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먹고 싶은 기분이다.


잠시 후 음식 두 접시와 함께 맑은 액체가 담긴 병이 테이블에 놓였다. 병에 담긴 것을 컵에 옮기니 코를 찌르는 향이 피어올라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나 아마도, 오늘은 좋아하지 않는 이것과 함께 해야만 할 것 같다.


단숨에 들이켠 술이 식도와 위를 불태워 그 고통에 몇 초간은 머릿속에 든 것에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뿐, 너무나도 맑은 정신은 알코올에도 지지 않고 여전히 내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내가 지금 몇 살이지……?”


 

레조가 내민 그 손을 잡은 그날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주스럽게도 긴 수명과 좀처럼 늙지 않는 외모조차 그 녀석을 닮아 나이를 헤아리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흔해빠진 대사를 빌어 읊어보자면 수천 번의 해가 지고 또 떠올랐고, 수백 번의 비가 오고 그것이 다시 눈이 되어 내렸으며 흘러간 강물이 다시 흘러 들어올 정도, 는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대한 레조의 증오는 아직도 남아 후끈한 열기를 주고 있는 것이다. 벌써 수십 년간 아무도 살지 않았을 이 집이 별안간 불에 타올라 잿더미로 변해버린 것이 그의 집념 때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몇 잔째일 지 모를 위스키가 계속해서 식도를 뜨겁게 달궜다. 이 머릿속을 비워준다면 고통마저도 반갑다. 그 맛을 채 음미하기도 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


 

힐끔거리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나를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노인. 기억에 없는 자다.


 

“왜 쳐다보시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 아닐세. 흠흠, 그게 아니라…….”


 

노인이 어색함을 얼버무리려 헛기침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것처럼 보이기는 할 게다. 후드를 썼지만 식사를 위해 마스크를 내린 상태이니. 늘 있어온 일이기에 더 이상의 말을 섞는 것 대신 후드를 좀 더 깊게 눌러썼다.


어느새 술병의 바닥이 드러났다. 종업원을 부르려 고개를 들었는데, 조금 전의 그 노인이 아까보다 가까운 곳에 앉아서는 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보시오, 대체……!”


 

작게 으름장을 놓았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고 내게 성큼 다가왔다. 어쩐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았다. 나를 보고 반가워할 인간 따위는 이 지역에 없다.


 

“흠흠. 젊은이, 혹시 말일세.”
“…….”


 

설마 수십 년은 지났을 지명수배서 따위를 본 것일까. 손이 저절로 칼 위로 옮겨갔다. 스릉, 낮은 검 울림이 손끝에 전해진다.


 

“자네, 현자 레조 님의 손자가 아닌가?!”
“……뭐라고?”

.

.

.

.

.

.

.

.........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아리따운 노인과 함께 전설의 현자님의 족적을 찾아 헤매는 뷰티풀 러블리 손주 제르가디스의 기나긴 여행......보다는 수십년에 만난 소년 제르가디스를 기억해 낸 당시 미모의 한 청년이 황혼의 사랑을 꿈꾸......................(퍽)

 

 

순전히 이 후기 드립을 위해 '사죄' 1편을 남겨둡니다. 본편은 따로 업뎃했어용(도망)